피터의 편지

하나님의 응답, 인간의 응답

작성자
Peter
작성일
2021-06-02 09:27
조회
57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멀쩡한 사람이 없습니다. 전에는 자기 상처를 숨기고 다녔는데 이젠 다 드러내기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폭발 직전의 가스통이라고나 할까요.

사람들이 상처를 드러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도피, 하나는 폭발. 세상에 충격을 준 정인이 사건만 해도 내면의 상처가 폭발되어 나오는 과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얘기만 들어도 몸서리가 날 지경입니다. 7개의 골절과 4개의 피하 출혈이라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그 예쁘고 어린 여자아이가 후두골 골절에 좌측 쇄골 골절, 좌측 늑골 골절, 우측 늑골 골절, 우측 척골 골절, 좌측 견갑골 골절, 우측 대퇴골 골절, 소장 대장 장간막 파열로 배 속에 피가 가득하고 등에 피하 출혈, 옆구리에 피하 출혈, 다리에 피하 출혈, 무엇보다 충격인 것은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서 웬만한 충격으로는 터지지 않는 췌장 파열까지…. 50킬로그램 여자가 소파에서 있는 힘껏 점프해서 밟아야 파열된다는 췌장이 다 망가질 정도로 어린아이를 폭행한 사람이 경건한 목회자 자녀라니 어찌 놀라지 않겠습니까. 아이를 폭행해 죽인 엄마는 아버지가 현직 목회자인데다 기독교 대학으로 유명한 곳에서 통번역을 공부했고, 그 남편도 목회자 자녀에 부인과 같은 학교를 나와 기독교 계통의 방송국에서 근무했다니 잘못 들었나 싶었습니다.

오래전 어느 외과 의사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지요. 그는 수술에 들어가기 위해 환자에게 마취를 하기 전 누구에게나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수술은 내가 하지만 치료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참 대단한 분입니다. 이분은 대놓고, ‘진짜 의사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분을 믿는다.’ ‘인간 의사는 실수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나는 내 실력만 믿고 수술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고 수술한다.’ 그러고 보니 이 분은 의사가 아니라 자신을 간호사라고 밝힌 셈입니다. 의사이면서도 간호사. “수술 칼은 내가 잡지만 수술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나는 실수할 수 있으나 주님은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으십니다.” “나는 겨우 수십 명밖에 진료한 경험이 없으나 그분이 고친 환자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나는 겨우 십여 년 의학 공부했으나 그분은 태초 이전부터 이 어마어마한 우주를 설계하고 우리 오장육부를 샅샅이 설계하신 분입니다.” 물론, 이제 이런 의사는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교인이라고 밝히지 않는 의사가 더 많습니다. 밝혀지면 불이익 당할까 조심하는 분위기입니다. 동성애자보다 커밍아웃하기 힘든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겁니다.

그뿐인가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범죄의 주인공으로 기독교인이 자주 등장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생후 팔 개월 된 아이를 입양해다 발로 밟아 죽인 정인이 부모뿐 아니라, 최근 애틀랜타에서 총기를 난사해 여섯 명의 아시아인을 죽인 범인도 목회자 아들이었다는군요. 범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사건 전부터 심각한 섹스 중독자였다는 겁니다. 그 일로 목회자인 아버지와 싸우다 집을 나온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 목회하는 그의 아버지는 회복사역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까마득히 몰랐을 겁니다. 교회가 병원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육체뿐 아니라 영혼이 병든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시편 69:1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성경 공부만 잘 시키면 저절로 회복될 거라고 믿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격을 가졌다고 말할 때 인격은 지성뿐 아니라 감정과 의지를 다 말합니다. 우선적으로는 지성에 복음이 들어가야 하지만 상한 감정, 악한 감정, 더러운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들을 뿐 아니라 지성소에서 상처를 다룸도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들음과 다룸 후 회복되어 나오는 순종이 진짜 순종인 셈이지요.

수년 전부터 『직면』이라는 책을 쓰고 교회 안에서 흠스HMMS와 틴즈 흠스TEENZ HMMS, 키즈 흠스KIDZ HMMS 같은 복음적 회복사역이 간단없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외쳤는데, 별 반응이 없어 안타까워하던 차에 사방에서 마구 터지는 끔찍한 사건들, 그중 유난히 기독교인이 많고 심지어 목회하는 부모 밑에 자란 자녀들이 자주 연루되면서 오늘 한 번 더 외쳐 봅니다. 제자 훈련만큼 회복사역을 강조하고 유치부부터 지성소 예배와 직면을 생활화하며 모든 성도는 간호사로, 자녀 가진 부모는 복음사역·회복사역·문화사역 전문가로 양육하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도 폭발하는 환자들이 점점 많아질 거라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교회에서 간호사 역할은 일반 병원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의사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 의존성 환자가 교회에 나왔을 경우, 간호사의 도움 없이 보이지 않는 의사 앞에 가라고 하면 화를 낼지 모릅니다. 우울증 심한 사람에게 지성소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해 주면 황당해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내가 말하는 직면이 어렵게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는 의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믿음이 약하거나 믿음이 어린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사람을 더 의존하려고 할 것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직면보다 나눔이 더 잘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지성소에 들어가 직면을 해야 삽니다!” 그러면 우물쭈물 머뭇거리던 사람이, 사람 앞에 털어놓으라 하면 삼십 분도 하고 사십 분도 자기 얘기를 한다는 겁니다. 리더를 비롯해 주위 사람들이 경청과 공감을 해 주면 눈물 콧물까지 쏟으며 소위 자기 고백을 한다는 겁니다. 삼 대째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알코올 중독자에 도박 중독자라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내뱉기도 합니다. 세 번이나 바람을 피웠다는 이야기. 지금도 바람을 피운다는 이야기. 심지어 아내 몰래 동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레 내놓는 교회도 있습니다.

실명이 아니라 익명으로 모이는 모임에서는 더 긴 이야기들이 오갑니다. 그곳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처음 시작이 어렵지 한 번 터지면, 밤새는 줄도 모르고 익명의 사람들 앞에서 자기 과거를 밝힙니다. 어떤 사람은 책 몇 권 쓰고도 남을 분량이 있다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만약 일반 병원에 가서 이렇게 한다면 얼마나 우스울까요? 의사는 빨리 자기 방(지성소)으로 오라는데 병원 휴게실 한가운데 환자끼리 둘러앉아 몇 시간이고 자기들끼리 찬송 부르다가, 자기들끼리 기도하다가, 자기들끼리 떠들며 웃고 울다가 집에 가 버린다면 의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오늘 대부분의 교회나 가정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나눔이 아니라 다룸.

경청이 아니라 기도.

상담 자격증이 아니라 예배 인도자.

치유가 아니라 회복. 통성이 아니라 직면 개념.

을 가진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이따금 학교 형태에서 병원 형태로 탈바꿈했다고 자부하는 교회도 가 보면, 직면은커녕 훈련된 간호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간호사가 없으니 간호라는 개념이 없고, 의사가 보이지 않으니 나눔과 경청, 공감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됩니다. 끼충가상나(끼어들기, 충고하기, 가르치기, 상담하기, 나누기)는 기본양념이고 잘 들어 주기만 해도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믿습니다. 뭘 토설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통성 기도만 하면 치유된 거라고 면죄부를 줍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죽기 전에 8주짜리 흠스를 이백 번 해야 한다고 우기니 누가 흠스를 교회로 가져가겠습니까. 인본주의적 상담이나 비성경적 치유 사역이 교회에서 버젓이 진행되어도 이단, 사이비 소리 안 나오는 건 정말 특이한 현상입니다. 자기 치부를 사람 앞에서 솔직히 드러내야 직분 준다는 교회까지 있다는 말에는 기가 막힐 뿐입니다. 그럴까요? 사람끼리 주고받았는데 문제가 해결될까요? 환자가 환자를 위로하면 기분은 좋아지겠지만 항상성이나 자충성 같은 견고한 진이 그렇게 해서 완벽히 사라질까요? 임재가 확인 안 된 상태에서 죄가 폭로되었을 때 사단이 가만히 있을까요?

많은 교인이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고 말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이 외면한다고 투덜댑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응답하셨는데 자기가 못 알아들은 겁니다. 벽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쌓아 주신 벽은 여우가 다 파먹을 때까지 못 깨닫고 자기가 쌓아 올린 벽에는 강력한 접착제를 덕지덕지 바른 까닭입니다. 드디어 문제가 터졌습니다. 정인이 부모 같은 사람뿐 아니라 코로나가 터지자 이런저런 이유로 화를 내고 나가 버리는 교인 수가 상당히 늘어났습니다.

이제는 회복(치유가 아니라)의 강을 건너지 않고 건강한 교회, 건강한 교회 학교, 건강한 가정은 언급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몇몇 교회가 자기네는 치유 사역(회복사역이 아니라) 잘한다고 으스대지만, 지성소 예배나 직면, 훈련된 간호사 개념도 모르고 신학 없는 인본주의나 율법주의, 심지어 뉴에이지적 신비주의에 빠져 가니 아슬아슬할 뿐입니다. 의사는 우리가 신경 쓸 영역이 아닙니다. 의사는 문제가 없습니다. 의사이신 우리의 하나님은 완벽한 치유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회복시키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본성에 의하여 변질되거나 파괴된 것을 다시 온전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요. 학교가 필요한 이유는 복음을 듣게 함이듯이 병원이 필요한 이유는 지성소에 들어가 자기 문제를 다룬 후 하나님의 성품으로 교체되어 유지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지가 안 되니 올라가자마자 추락인데 그 이유를 모르는 목회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안타까운 건 알만한 분들조차 이런 얘기를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오늘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왜 많은 교인이나 자녀가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지 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인간으로서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모르는 교인들이 왜 도피와 폭발 사이를 오가고 각종 대체물에 중독되는지 잘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원이 문제가 아니라 성격이 문제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해도 못 알아먹는 교회 리더들 때문에 오늘도 먼지 낀 먼 산만 바라봐야 하는 안타까움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회복 상태가 유지되지 못하면 응답하는 하나님 인식은 언감생심입니다. 하나님 인식이 안 되면 자기 인식, 세상 인식도 불가능해 안갯속을 헤매고 다닐 테니 그야말로 인생이 진퇴양난이 됩니다. 이런 상태를 정체성 혼란이라고 하지요. 문제는 자기만 헤매고 다니면 괜찮겠는데, 선물로 주신 자식, 돌보라고 주신 양들까지 헤매게 만드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이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 던지신 물음이었지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가 소리를 지르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즉시 그가 걷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나면서 소경 된 자도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도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나음을 입었습니다.

실로암 연못가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지요. 나면서 시각을 잃은 장애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신 말씀에는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눈먼 사람에게 실로암까지 가라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사랑의 대명사인 주님이 그런 말 하신 이유는 뭘까요? 이번 달 원고 중에 상담으로 박사 학위 받을 분이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우리 회복사역인 흠스에 와서 해답을 발견하였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감동입니다. 가끔이지만 이렇게 알아먹는 분이 있다는 건 적지 않은 위로가 됩니다. 필라델피아 제일장로교회 강 목사님이나 수지선한목자교회 강 목사님(둘 다 강씨 성이네요) 같은 분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표지에 나온 것처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칼을 꺼내 들었지요. 어린 이삭은 바들바들 떨었을 게 분명합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위대한 믿음은 봤지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음에 대한 공포는 벽을 만드는 데 사용했을 게 분명합니다.

이번 달 주제가 ‘응답’인데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응답은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주체가 달라지고 내용도 달라지지요.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응답하심이고, 사람 편에서 볼 때는 인간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이 회복의 은혜라면, 사람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은 천직을 통한 사명입니다. 아시다시피 낮은울타리의 소명은 자녀 양육, 다음 세대의 부흥 아닙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그분의 부활을 경험하고 그것을 보는 영적 지각으로 충만하여 변증 전문가와 양육 전문가로 세워져 가는 모습을 복되다 하시는 주님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과 회복과 문화! 생각할수록 참 기가 막히는 조합입니다.

 

<월간 낮은울타리 2021년 6월호 편집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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