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편지

자식만은 잃어서는 안 됩니다

작성자
Peter
작성일
2020-09-21 14:39
조회
364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나라가 뒤숭숭합니다. 각 가정마저 활기가 식어 가고 몇 달 사이 VIP 회원 백수십 명이 후원 철회를 하셨습니다. 코로나 이후 점점 어려운 시기가 올 것을 짐작은 하였으나 막상 회원 탈퇴 쓰나미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심경이 복잡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해는 갑니다. 수입이 줄어드는 판에 돈 드는 거라면 하나라도 줄여야 살지 않겠습니까? 오죽하면 자식 살리는 일에 들어가는 돈마저 줄이려고 하시나 이해는 가지만, 자식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원 회비는 나중에 내시더라도 VIP를 해지하면 안 되는 이유 첫 번째는 우리와 함께 교육이 아니라 양육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어려운 중에도 우리와 함께 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교육이 아니라 양육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양육 받겠다는 결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양육받아 양육하는’ 부모 됨이 마땅합니다. 나와 낮은울타리는 여러분에게 교육자가 아니라 양육자가 되고 싶습니다. 교육자는 Teaching을, 양육자는 Bring up을 합니다. Teaching과 Bring up은 같지 않습니다.
양육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경우 Teaching은 여러 사람에게 하셨으나 양육은 12명만 하셨습니다. 양육의 대상은 거듭난 사람의 영‧혼‧육, 지‧정‧의라는 전 영역이고 양육의 목표 지점은 변증가가 되거나 변증형 양육이 가능한 신부입니다. 그런 신부가 되어야 양육이 끝이 납니다. 왜 기독교 가정의 아이들이 상급 학교로 올라갈수록 교회를 떠나고 신앙생활을 포기하는지 아십니까? 양육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대부분의 교회가 양육이 아니라 교육을 목표로 사역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양육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부모들로 하여금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자녀를 쉽게 양육하도록 도울 자신이 있습니다. 반항적이 되기 쉬운 자녀로 하여금 제자 훈련을 받는 것에서 변증형 신부됨의 훈련까지 나아가도록 도울 자신이 있습니다. 뒤에 가서도 말하겠지만, 기가 막힌 것은 코로나 사태 이후 우리의 온택트 사역 방법이 더 유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작은 대안 학교, 맞벌이 가정, 소규모 교회에서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도록 도울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떠나면 안 됩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자녀 양육은 포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사역, 회복사역, 문화사역의 융합Convergence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통합은 물리적으로만 하나가 되는 것이고 융합은 melting용해이 되는 것과 동시에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면서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셋 중 우선순위는 복음입니다. 복음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회복사역을 통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문화사역을 통해서는 세상이 어떠한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경험되어지며, 나의 부정적 성격이 인식되고, 세상 정신의 정체가 확실히 파악되지 않는데 자녀를 양육하겠다고 나서는 건 위험천만입니다.
지금까지 복음사역, 회복사역, 문화사역의 융합을 내걸고 양육을 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편적 언급은 몰라도 우리처럼 각 영역마다 구체적 대안을 제시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복사역만 해도 흠스, 틴즈 흠스, 키즈 흠스로 세분되고 문화사역에서는 단순 강의를 넘어 왓처‧가이드‧프로듀서 리더십을 배양하는 학교 형태의 사역이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은 우리 사역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양육 계획을 세울 수 있고 단계별 양육 정도를 수시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미 주어진 BBS, GAS, JIS, JPA, NCS 등의 학교가 하나로 모아질 때 얼마나 엄청난 시너지가 날지 상상해 보십시오. 이들 학교의 특징은 훈련받은 부모가 직접 자녀를 양육하게 될 거라는 점입니다(VIP 중에는 아직도 이들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모르는 분이 많은데 안타깝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복음사역, 회복사역, 문화사역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선물이 있는데 5 JESUS POWER라는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고도 하는 생명력‧통찰력‧분별력‧창의력‧변증력으로 충만해진 상태에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일은 생각만 해도 행복하게 만듭니다.

구속사와 언약을 중심으로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래야만 구원의 은혜, 구원의 감격을 제대로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속사는 ‘누가 왕이냐?’의 물음에 분명한 대답을 하게 하고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나 같은 걸 위해 오래전부터 그 먼 길을 걸어오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역사를 확인할 때마다 우리 전인격을 그분에게 양도할 수 있게 만듭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5장 39절을 통해 성경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예수께서 우리에게 다가와 새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함께 살아가심도 경험했습니다. 내가 먼저 다가간 게 아니라 주님이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내 지식으로 알아진 게 아니라 뚫고 들어오심으로 인식되어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화聖化라는 것도 변화가 아니라 교체라고 규정했으며 성화의 목표 지점은 신념이 아니라 성품이라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나의 부정적 성격을 주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교체시켜 주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예배와 훈련의 목적이 되어야 함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창조보다 언약이 먼저 있었다’라는 말씀에 감격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위시해서 6대 언약, 구약, 신약을 통해 작정하심, 예정하심, 구원하심, 섭리하심, 경륜하심을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언약대로 우리를 자녀, 종, 청지기, 제자, 신부로 만들어 가실 것을 양육 통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구속사와 언약을 중심으로 성경을 본다는 건 역사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나아가 구원 역사를 전인격으로 체험하는 것을 양육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자녀 양육을 최우선에 둡니다
여기서 자녀라 함은 육적 자녀, 영적 자녀 모두를 말합니다. 내 배에서 나온 자녀만 자녀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자녀를 말할 때 영적 자녀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울과 디모데를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낳았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통해 구원받은 자를 영적 자녀로 봅니다. 그 육적 자녀, 영적 자녀를 주의 거룩한 백성, 신부로 양육하는 일을 최우선에 두는 것입니다.
자녀 양육을 최우선에 두는 이유는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와 사시는 동안 양육에 우선을 두었습니다. 선포와 치유도 하셨지만 12명의 제자 양육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자녀 양육을 최우선에 두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가정과 교회의 유지를 위해서입니다. 가정과 교회가 제 기능을 상실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십시오. 벌써 서구 교회는 오스 기니스가 예언한 대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자녀를 세속화에 빠지게 하고 양육에 실패한 뒤 선교, 봉사, 구제를 외치는 건 자칫 공허한 메아리 될 위험이 있습니다.
자녀 양육을 위해서는 부모가 중요합니다. 부모의 동참 없이 자녀 양육은 불가능합니다. 교회에 일주일 하루 불러 교육하는 일은 현저하게 효과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양육에는 시간 총량의 법칙, 반복 효과의 법칙, 고강도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낮은울타리 사역에 동참하셔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 핵심사역과 세 가지 법칙에 있어 차별화된 전략과 내용 때문입니다. 앞에 말한 대로 복음사역과 회복사역, 문화사역을 융합하고 변증을 목표로 하며 제자 됨을 넘어 신부 됨에 초점을 맞추는 양육은 지금껏 없었습니다. 그것도 부모와 자녀를 동시에 양육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그 가능성의 현장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복음변증학교》 하나만이라도 접속해 보십시오.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변증을 삶의 목표로 삼습니다
변증이 양육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죽더라도 자식은 살리고 죽자』 책에 자세히 써 놨습니다. 꼭 참고하기 바랍니다.
자식을 변증가로 키워야하는 이유는 베드로전서 3장 15절 말씀대로 소망을 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뿐인가요. 변증하지 않으면 변증 당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초등학문에 변증 당하고 터덜터덜 들어오는 자식을 보고 싶지 않다면 지금부터라도 변증 훈련에 마음을 두기 바랍니다. 논쟁보다 변증이 좋은 이유는 논쟁은 벽을 만들지만 변증은 창을 만들고 논쟁은 적을 만들지만 변증은 친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논쟁도 그렇지만 변증하며 사는 삶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양육의 목표를 변증에 두는 이유는 소망을 전하는 최고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소망을 잃고 자살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동성애나 종교 간 비교 등 변증할 것도 너무나 많은 나라입니다. 변증은 싸우자고 덤벼드는 게 아니라 상대의 언어와 문화로 진리를 설명하여 이해시키는 거룩한 과정입니다. 진리가 생명으로 인식될 때 죽을 자가 살게 되며 절망이 소망 된다는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 영역이라 해도 변증으로 소망 전하는 일은 우리 영역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통해 변증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변증을 못하면 양육이 안 된 겁니다. 우리는 당신이 변증할 때까지 최선을 다 해 도와드릴 것입니다. 중간에 그만두면 할 수 없지만 원한다면 변증이 가능할 때까지 같이 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4기 사역으로 시작한 《복음변증학교》에 자녀와 적극 동참해 주시기를 권합니다. 이번만큼 변증을 실제화하기에 좋은 기회가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시기 바랍니다.

감각적 신앙보다 체계적 신앙 갖게 하는 데 양육 목표가 있습니다
감각적 신앙은 아가서에서 배웠습니다. 충격적인 건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의 신부가 된 후 감각적 신앙에 빠져 신랑을 놓치고 문도 안 열어 주는 실수를 했다는 점입니다.
감각적 신앙이란 개념이 없고 체계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감각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분위기에 자주 휩쓸리고 감정에 쉽게 휘말려 들어갑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경험을 하나님의 계시라 우기고 변증하라면 변명만 늘어놓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자기 기분에 따라 내리기 때문에 늘 불안합니다. 안정감이 없어 작은 바람에도 흔들립니다. 자식을 위험하게 만드는 부모가 거의 그렇습니다. 그러잖아도 요즘 어린아이들이 감각적 문화의 영향을 받아 감각적 인간이 되어 가는데 부모마저 그런다면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실존주의나 인본주의는 물론, 교회를 망치는 신비주의 영향을 받아 신앙이 감각화 될 때 고귀한 진리가 절대적 영역에서 상대적 영역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걸 간과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사역은 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해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로, 오직 성경 안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며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66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며 그 안에 약속된 지혜와 계시의 영 받는 일엡1:17에 우선순위를 두되, 자녀에게 거짓 선지자 병든 권위자로 살지 않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 직면ENCOUNTER하는 걸 밥 먹듯 하게 돕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흠스HMMS라는 회복사역은 정말 복음적이고 효과도 뛰어납니다. 어른을 위한 흠스도 탁월하지만 틴즈 흠스와 키즈 흠스는 더 탁월합니다. 기가 막힌 것은 코로나 때문에 줌ZOOM으로 틴즈 흠스와 키즈 흠스를 열었는데 그 많은 청소년, 어린이가 참여하여 은혜를 받는 모습 보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믿겨지지 않는 현장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우리는 타고 난 감성보다 숨겨진 상처가 더 위험하다고 봅니다. 우리의 양육 현장에서 상처는 트라우마로 읽히지 않습니다. 사랑의 결핍으로 읽힙니다. 사랑의 결핍은 마음에 벽을 쌓게 만들고 부정적 성격을 형성하게 합니다. 이것이 주님 인식을 방해하고 의존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 말하는 사랑은 복음으로 이해되고 지성소에서 채우는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는데 사랑 탱크가 텅 비어 있는 부모가 너무나 많습니다. 감각이 상처와 마주치면 욕망으로 변질되는 건 시간문제이므로 우리와 함께 가려는 분들은 주님 주신 감성이 욕정이나 욕망의 감각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체계적인 복음 공부는 물론, 흠스 사역에 200번 이상 참가하도록 권고합니다. 부디 감각적 신앙에 빠져 율법주의, 은사주의, 영지주의, 세속주의, 뉴에이지 광풍에 휘말려 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시간 복음사역과 회복사역과 문화사역 융합의 맛을 깊이 체험하기를 권합니다. 예수를 먹고 예수에게 먹히는 일, 예배가 생활화되고 직면이 일상화되지 않으면 핵심 감정에 속고 육의 교활함에 속아 감각의 늪에 빠지기 쉽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자 됨 훈련에서 신부 됨 훈련으로
호칭이 관계를 만들지 않습니까. 자녀, 종, 청지기, 제자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지요. 자녀, 종, 제자라는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를 타자화他者化하기 쉬운데 신부는 아닙니다. 신부만이 신랑과 같은 침실을 쓰고 한 몸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부가 아니고는 연합의 깊이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양육은 피양육자인 자녀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게 하는 데 목표를 둡니다.
신부라면 에베소서 5장 32절 혼인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아가서를 제대로 요리해 먹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가서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신부론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신랑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려야 하는데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역사의 종말이자 묵시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오직 신랑이 준 것만 자랑해야 합니다. 그게 신랑이 원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부의 유방에서 젖이 나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양식인 복음을 충분히 먹어야 합니다. 젖이 안 나오면 자식을 먹일 수 없습니다. 양육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솔로몬이 아가서 7장에서 술람미의 유방을 왜 극찬했겠습니까? 우유보다 모유가 중요한 이유는 양육자의 DNA가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DNA로 혈육 관계를 검사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 DNA가 흘러가지 않는데 성령으로 양육한다고 우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부의 유방에서 나와야 할 신령한 젖은 신랑의 사랑으로 만들어집니다. 신부가 지성소인 침실에 들어가 신랑의 사랑을 먹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으면 자녀로 거듭납니다. 자녀로 살다가 어느 날 종이 되겠다고 서원합니다. 그다음 청지기로, 제자로 자라갑니다. 거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많지만, 아닙니다. 신부 단계가 있습니다. 신부는 소명으로 결정되지만 신부됨은 훈련으로 결정됩니다. 우리의 사역은 신부로 부름 받은 자를 신부 되게 하는 데 목표를 둡니다. 이 책에 어린이를 위한 아가서를 연재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초점, 관점, 지향점이 일치되어야 양육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육자와 피양육자는 초점‧관점‧지향점이 같아야 한다는 게 우리 생각입니다. 교육자는 방향만 정해 주면 되고 보모는 음식 제공과 잠자리, 코치는 특정 기술만 높여 주면 되지만 양육자는 피양육자가 자기와 초점‧관점‧지향점을 일치시키는 걸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단지 성경(율법)을 공부하는 게 목표였다면 베드로 같은 어부를 부르지 않고 바리새인 같은 전문가를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귀신같이 알아도 주님과 초점‧관점‧지향점을 맞출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열심히 살았으면서도 양육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가 하는 자녀 양육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세계관), 지향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영역)입니다.
복음의 측면에서는 구속사와 언약을, 회복의 측면에서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관계적 측면에서는 신부의 영성을 갖추어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우리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사역‧회복사역‧문화사역을 융합하여 수행하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셨습니다. 이 척박한 땅에서 31년을 견디게 하시고 수많은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우리 사역 방법이 더 유리하게 하셨습니다. 비대면으로도 부모 자녀 변증 훈련이 가능하고 온택트ontact로도 깊이 있는 회복사역이 가능하다는 걸 눈으로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지금이라도 당신의 가정, 당신의 교회에 우리 사역을 접목해 보십시오. 재정 때문에 이렇게 호소하는 게 아닙니다. 굶어죽겠다는 각오로 31년을 살아왔는데 무엇이 두려워 이제 와서 구걸을 하겠습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건 잃어도 자식만은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건강한 부모가 되어 건강한 자녀를 양육하고 나서 주님께로 가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우리 만남에 어찌 우연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땅의 부모를 도와 그 자녀를 올바로 양육하게 한 다음 주 예수 이름으로 파송하라는 부탁을 주님에게 받았기 때문에 오늘도 광야 같은 곳에서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부디 나라가 어지럽고 세상이 하 수상해도 우리와 함께 가시면서 자녀 양육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샬롬.

 

월간 낮은울타리 2020 10월호 편집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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