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편지

하나님의 사랑 아니면 어떻게 이런 시대를 기쁘게 살아가겠습니까

작성자
Peter
작성일
2020-08-31 14:42
조회
1375

 

얼마 전 경향신문에 실린 장대익 교수의 칼럼을 태릉에 있는 병원 진료실에서 읽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유통기한은 남아 있을까?’라는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꼈습니다.

알 만한 분은 아시지만 학자로 방송인으로 잘 나가는 장대익 교수는 중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교회에 잘 나가던 성실 신자였답니다. 그러나 그가 대학에 들어가 진화론을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기독교가 허상임을 깨닫고 교회 다니기를 그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모태 신앙인이었다고 말하는 그가 어쩌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을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거기까지는 그렇다 쳐도 일간 신문에 이런 칼럼을 대문짝만하게 쓴다는 건 안타까움을 넘어 비극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장대익 교수 칼럼을 거의 전부 인용해 보겠습니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망상에 사로잡힌 일부 종교 집단들 때문에 국가적 대혼란에 빠졌다.

사랑제일교회의 전광훈 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극보수 목소리를 내는 한기총의 대표로서 이번 광화문 집회 사태의 주역이다. “중국 우한 바이러스로 우리 교회에 테러를 했다. 집회에 참석하면 성령의 불이 떨어져 있던 병도 낫는다”는 그의 발언은 상상력과 근자감의 결정판이다. 엎드려 사과한 신천지의 이만희 씨가 작아 보일 지경이다.

어디 전 목사뿐인가?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발효와 행정명령에도 기어코 대면 예배를 강행한 교회가 엊그제 부산에만 270여 곳이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단 감염 사태를 막아야 하는 이 엄중한 시국에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저항하는 그들은 과연 어떤 정신의 소유자들일까? 타자의 고통에 함께 몸부림쳤던 예수가 살아있다면 어디 편이었을까? 유치원을 비롯한 모든 단체가 방역의 끈을 다시 조여 매고 있는 상황인데 한국의 개신교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괴물은 갑자기 태어나지는 않는 법이다. 2007년 한 개신교 교회에서 파견한 아프가니스탄 단기 선교팀이 탈레반의 무장 세력에 납치돼 40일 만에 풀려난 악몽 같은 사건이 있었다. 탈레반은 결국 두 명을 살해했으며 한국 정부가 지불한 거액의 몸값을 챙기고 나머지를 풀어줬다. 그런데 전 국민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린 이 비극이 채 끝나기도 전, 그 교회의 담임 목사는 두 청년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피를 뿌린 사건”

하지만 이 깔끔한 정리는 ‘선교가 불법인 곳에 청년들을 파견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이들을 소름끼치게 했다. 지금은 익숙한 ‘개독교’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그때다. 타인(타집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 온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짧지 않다.

광화문 집회에 참여한 사랑제일교회 신도들과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교인들의 행태도 같은 선상에 있다. 국가 전체에 피해를 주면서 자기 자신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예배는 생명이기에 목숨 걸고라도 대면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강변하는 교인들에게 ‘당신 목숨이나 거세요. 타인에게 피해 주지 말고’라고 소리치고 싶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체 왜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었을까? 자신의 목숨마저도 가벼이 여기면서 말이다.

2001년 미국 9·11테러 발생 직후,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한 일간지 칼럼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만일 모든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한다고 치자. 그러면 자살 테러 같은 만행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줄어들 것이고, 어떻게든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들 것이다. 내세를 가르치는 종교는 사람들을 언제든 살인 무기로 만들 수 있는 정신 바이러스의 일종이다.” 이 기고문으로 그는 수많은 종교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종교 없는 세상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의 문제작 <만들어진 신>은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종교가 ‘정신 바이러스’라는 주장은 비유를 넘어선다. 인간은 모방의 귀재로 진화했다. 인간의 독특성은 특출한 모방 능력에서 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에 도킨스는 유전적 방법이 아닌 모방을 통해 한 개체에서 다른 개체의 기억 속에 복제될 수 있는 문화 전달 단위를 ‘밈meme’이라 명명했다…(중략)

도킨스가 유신론적 종교를 박멸해야 할 정신 바이러스라고 규정하고 인류가 하루빨리 ‘신이라는 망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를 보살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복제만을 위해 인간 숙주를 무차별 공격할 뿐이다. 도킨스는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신념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한국의 개신교와 교인들을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지 않은 그들이 자신의 밈에 사로잡혀 우리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창조론을 과학 교과서에 집어넣으려 온갖 꼼수를 부리고, 상식적 인권이라 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며, 아직도 빨갱이 얘기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실의 영역뿐만 아니라 가치의 영역에서도 꼰대가 된지 너무 오래다. 역사가 증명해 주는 바, 지식과 가치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과연 한국 개신교의 유통기한은 남아있을까?

어떻습니까?

개신교(기독교)의 유통기한이라니 기가 막히는 표현 아닙니까?

무슨 통조림도 아니고….

나무위키에 실린 내용을 보면 서울대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 기독교 신앙생활을 유지해 유신론적 진화론자라고 자인하던 중 박사 과정 하면서 완전 무신론자로 돌아섰다는데 진화론이 한 사람의 영혼을 이렇게 바꿔 놓을 만큼 매력적인 학문인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습니다. 아니면 교회 다니면서 깊은 상처를 받은 건 아닌지… 머리 좋고 글 잘 쓰기로 소문난 분이 앞으로 두고두고 기독교를 유통기한 지난 종교라고 몰아붙일 생각을 하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북한의 김정은 같은 사람이 그런다면 모를까 모친의 뱃속에서부터 교횔 다니던 사람이 이런 글을 쓰고 이런 말로 방송을 해 대니 더 기가 막히는 거지요. 나는 복음변증 강의를 통해 ‘예수가 진짜냐 가짜냐에 따라 기독교인이 사기당한 거냐 아니냐가 결판난다’라고 했는데 장대익 교수는 그 질문에는 별 관심이 없었나 봅니다. 기독교의 진실성은 기독교인에게 초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게 초점 맞춰야 한다는 걸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예수가 인간이라면 장대익 교수 말이 맞는 것이고 예수가 신이라면 장대익 교수는 큰 실수 하시는 겁니다. 아무튼 장대익 교수도 교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대한민국 정치가와 언론의 기독교 때리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사실만 쓰면 괜찮은데 왜곡 편향 보도라니 기가 막힐 일이지요. 기독교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니 이런 기막힐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광화문 광장에서 민주노총 사람들이 데모하는 건 괜찮고 기독교인들이 정부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모이는 건 그렇게 나쁜 일일까요?

불교나 천주교의 미사나 예불은 괜찮고 기독교인이 방역 지침을 지키면서 대면 예배를 드리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일까요?

진화론을 교과서에 싣는 건 괜찮고 창조론을 교과서에 싣자는 건 그렇게 악한 일일까요?

기독교인이 인권 침해 받는 건 괜찮고 동성애 클럽의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게 하는 건 정의로운 일입니까?

이상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정부 관리나 장대익 교수뿐 아니라 대한민국 수많은 언론이 기독교를 집중 공격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휴가 기간에 여행 많이 다니라고 쿠폰까지 발행해서 그 분위기에 들떠 수많은 인파가 제주도나 부산을 뒤덮은 뒤 발생한 코로나를 광복절 기독교 집회 때문이라고 싸잡아 비판하는 걸 보면 기독교를 적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 급진적이라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코로나는 잠복기가 있게 마련인데 광복절 날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다음다음 날 확진자로 둔갑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검사자 대비 발병률은 몇 개월째 똑같은 수준인데 기독교 때문에 코로나가 대유행이라고 떠드는 모양새도 심상치 않습니다.

이태원 동성애 클럽에서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 일부 언론이 클럽 이름도 안 밝히고 이태원 클럽이라고만 했는데도 동성애 인권을 침해하지 말라고 떠들던 사람들이 전광훈 목사와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 이름은 만천하에 공개해 몹쓸 사람 만들고 교회 출석도 하지 않던 칠십 몇 번 확진자를 굳이 여의도 순복음교회 교인이라고 밝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싶습니다. 국제 변호사인 이태희 목사에 따르면 보건복지부 통계에도 교회 내 발병률이 최저로 나오는데 언론들은 교회 때문에 코로나가 폭발했다고 대서특필입니다. 아무튼 신천지 때보다 더하면 더하지 싶은 공격이 파상적波狀的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던 터에 일간 신문을 빌어 작심한 듯 써 내려 간 장대익 교수의 글을 읽자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철 지난 통조림처럼 내다 버려야 할 존재라 생각하겠구나’ 한숨이 절로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승려는 ‘스님’이라 부르고 신부는 ‘파더’라고 부르면서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고 목사를 ‘파렴치한’으로 부르는 사람들. 기독교인을 코로나에 빗대 정신 바이러스라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 왜들 이렇게 기독교를 미워하는 것일까요.

하긴 예수님도 그러셨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게 될 거라고(요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고.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15:20)” 그래요. 세상이 예수님을 이유 없이 밟았으니 우리도 밟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동안 종교의 자유 분위기 아래서 아무 방해 없이 예배당 짓고 새벽 기도 종소리도 크게 울리고 원하는 시간에 마음껏 예배드리며 찬송가도 우렁차게 불렀던 세월이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아마 이런 추세대로라면 거리에서 성경책 들고 가다 찬물 세례를 받을 수 있고 아파트 근처에서는 통성 기도도 금지되며 길거리 전도는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미국의 사례처럼 12월 25일 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했다가는 특정 종교 주입으로 정신적 피해를 봤다며 고소하는 사람도 나올 것입니다. 직장에서는 기독교인이라고 차별 대우 받고 공무원의 경우 교회 다닌다고 불이익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심한 경우 누군가 교회에 불을 지르거나 테러를 감행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언론이 적개심을 부추기는데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가로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이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하나님의 허용 범위 안에서 고난 형태로 다가오게 될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서 밟히는 자로 살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시련, 핍박이라는 이름의 고난이지요. 바울도 이미 예견하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게 될 거라고… 그러나 그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며 오히려 감옥 안에서도 찬양을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실컷 두들겨 맞고 쇠사슬에 묶인 채, 부당하게 고난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2:19),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세상의 끝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북극의 빙하가 녹든 중국과 미국이 핵전쟁을 벌이든 지구 역사가 몹시 위태로워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 마음의 분노도 전보다 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도 그랬지 않았습니까. “죽여라!”

저들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을 되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니면 어떻게 이런 시대를 기쁘게 살아가겠습니까.

참, 이럴 때 일수록 변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미움 받고 밟힘 받으면서 하는 변증. 그것만이 사랑의 증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월간 낮은울타리 2020 11월호 편집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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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01 1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