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편지

그 위에 옷만 입혀논 형국

작성자
Peter
작성일
2015-03-07 10:05
조회
783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은 신문 인터뷰에서

"탈북 청소년들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아이들이다.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품고 있다. 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보호와 치유가 필요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낮에 아이들을 보면 이 애들에게 무슨 상처가 있겠어? 하겠지만 밤이 되어 잠꼬대 하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 했습니다.

아이들은 잠을 자면서

"얼른 피해"

"숨어"

"도망 가" 같은 잠꼬대를 연신 내뱉는다고 합니다.

조 교감은 탈북한 아이들을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한 상처가 있는데 그 위에 옷만 입혀논 형국'이라고까지 표현을 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표현을 대놓고 하다니

그러면서 교과과정을 가르치는게 우선순위가아니라 가슴 속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말한 그녀의 말에 공감이 갔습니다.

아픈 사람은 병원부터 데려가야지 통증이 심해 숨도 못 쉬는 아이나 어른에게 "국어공부 할래?" "산수 공부 할래?"라고 묻는 건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무지에서 비롯된 폭력이라는 생각을 평소에 가져왔던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분입니다.

그녀의 희생은 많은 탈북 청소년의 가는 길을 도와주면서 통일을 준비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중국에서 공안에게 잡혀 간신히 탈출하는 등 온갖 수모를 다겪으면서도 조선족과 북한 탈출 동포를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그녀의 삶은 안이하고 나태하기 쉬운 나의 일상에 경종을 울려줍니다.

한 사람의 희생이 여러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건 사역자로서 갖는 당연한 생각이지만 그것을 평생 실천에 옮기며 사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탈북한 청소년 뿐 아니라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도 그에 못지 않게 아픈 아이들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상처를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감정의 문제, 마음의 문제라고 할 때 탈북 청소년 뿐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가 꽃 피는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 상당수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상처가 있는데 옷만 입혀논 형국'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상처 때문에 벽을 쌓고 도피나 폭발 쪽으로 가서 자신도 원치 않는 삶을 사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은데 모르고 있거나 쉬쉬하고 있는 거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상처는 회복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치유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회복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회복과 치유는 다릅니다.

우선 치유가 부분적이라면 회복은 전인적입니다.

치유가 심리학을 전제로 한다면 회복은 보혈을 전제로 합니다.

치유가 사람이 필요한 과정이라면 회복은 사람이 끼어들지 않을수록 효과적입니다.

치유가 감정을 주로 다룬다면 회복은 이성과 의지 뿐 아니라 영혼과 육을 모두 아우릅니다.

치유가 자신의 문제에 국한된 반면 회복은 자기에게 상처 준 권위자까지 포함합니다.

 

한마디로 온전한 회복은 일반적 의미의 치유 범위를 훨씬 벗어나 지성소에 들어가야 가능하고 보혈의 은혜로 덮여야 가능하고 직면이라는 영혼의 호흡이 있어야 가능한 엄청난 과업입니다. 회복의 열매는 물론 성품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본성은 구원 받을 때 완전 교체되었기 때문에 구원 받은 후 회복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성품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품에 대해서는 다림줄 사역을 체계화한 부르스가 잘 설명했지요. 그는 다림줄이 휘어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4개의 부정적 성품을 순응 형, 할 수 없어 형, 경쟁 형, 비판 형으로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물론 이 4개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순응 형과 할 수 없어 형이 섞여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경쟁 형과 비판 형이 섞여 나타나기도 합니다.

 

회복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필요한 사람'은 전적으로 간호사 역할만 해야지 의사 역할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간호사란 끼충가상을 하지 않고 오직 직면을 돕기 위해 사역하는 자를 말합니다. 지성소 예배, 성막(장막)예배, 임재예배를 통해 직면자를 지성소로 인도한 후 중보기도와 세레머니를 해 주는 사람을 우리는 간호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가정이나 교회, 미션스쿨 같은 데서 이런 올바른 개념 올바른 회복사역이 이루어지지 않고 상담 수준에 머물거나 비성경적 치유과정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탄식을 합니다.

비성경적 치유란 아이들을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돌팔이에 맡겨 대충 치료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어떤 부작용이 날지 훤히 알고 있기에 탄식이 나는 것입니다.

 

누누히 말하지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좋은 소식은, 굿 뉴스라고도 하고 복음이라고도 하는데 그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며(로마서 1:2-4) 그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6).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명과 생명력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0:10).

따라서 기독교는 생명 외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가듭난 사람이라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생명과 생명력 얻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삼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설교자가 생명에 대해 자주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생명력이 약하거나 생명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겠지요.

만약 어떤 기독교인이 생명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한다면 생명이 없거나 세속화된 기독교인일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복은 생명을 전제로 하고 생명을 근거로 해야 합니다.  

생명과 생명력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주실 수 있습니다.

생명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한 번 주어지며 생명력은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직면할 때 마다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1회성으로 얻지만 생명력은 무한 반복과정으로 얻어야 합니다.

생명을 얻은 자가 생명력 얻는 것에 관심 없다면 그것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부분은 몰라서 못 얻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왜 매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데 생명력 얻는 것을 모를까?

그래요.

대부분은 종교적 활동과 생명력 사역을 혼동하고 있으니 회복에 대해서도 모를 수밖에, 그러니 인본주의로 범벅이 된 상담이나 여러가지가 혼합된, 참으로 이상한 치유사역이 교회 내에서까지 횡행할 수밖에... 

 

여명학교 조명숙 교감은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털어 탈북 청소년을 도우며 살아갑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적당히 살아가도 되겠다는 나의 마음에 불을 지릅니다.

그녀가 한 말 중에 탈북 청소년들은 너무 아파 뼈에 옷만 걸쳐놓은 형국이라고 한 부분이 오늘 잠자는 나를 깨웠습니다. 나는 탈북하지 않고도 아픈 아이들과 부모들을 위해 사역하지만 그녀는 목숨 걸고 탈북한 아이들을 돌보기에 더 힘이 들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아픈 아이들은 공부보다 치료가 시급하다는 말에 더 깊은 공감을 하면서

우리 안에 성경적 회복사역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봄에도 뉴저지를 비롯한 몇 군데에서 틴즈흠스가 열린다는데 부디 참가한 아이들과 교사들에게 놀라운 회복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부모를 대상으로 한 본부 흠스는 벌써 26기에 들어갔습니다. 

흠스와 틴즈흠스 사역은 생명력 사역이고 순복음강북교회나 화성 안천교회, 주님기쁨의교회, 부산 수영로교회에서 열리는 사역은 통찰력 사역입니다.

수영로교회는 벌써 5학기 째입니다. 2년 반동안이나 부산을 오갔는데 이번 학기는 낼모레부터 시작입니다.  충남 당진에서 청년부 강의해 주고 대전역으로 가 부산까지 케이티 엑스 타고 가서 하룻밤 잔 다음 월요일 오전 오후 강의하고 또 하룻밤 자고나서 서울로 올라오는 일을 매주 해야 하지만 걱정보다 기대를 갖습니다.

이번 학기는 어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문화만 다룰 때는 전혀 몰랐던 회복의 은혜, 특히 생명력과 통찰력 사역의 열매를 매일같이 맛보며 사는 것은

정말 큰 은혜입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