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편지

사랑의 편지 23

작성자
Peter
작성일
2012-03-20 10:05
조회
491

샬롬! 오래간만에 사랑의 편지를 띄웁니다. 

 

그간도 평안하셨지요? 

 

 

 

 

이번 달에는 국내의 교사대학 강의와 미국 LA HMMS 1기 개강. 마이애미 직면학교와 HMMS 1기 개강, 애틀란타에 있는 조지아 크리스천 대학교 하루 직면학교와 영락교회, 세광교회 집회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LA도 흠스가 잘 정착되었고 열악한 마이애미도 아름답게 출발을 하였습니다. 

 

최근엔 흠스 뿐 아니라 직면학교에 대한 비전을 주셔서 더욱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사역소식은 다음 편지에 자세히 써드리겠습니다. 

 

 

 

 

오늘 사랑의 편지는 이번 낮은울타리 3월호 편집인의 글로 써 둔 '부활에의 초대 '글을 보내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몇 군데 고쳐서 부활카드로 보내셔도 좋을듯 싶어서 보내드립니다. 

 

봄과 함께 아름답고 풍성한 부활절을 맞이하시길.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을 굳게 믿습니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 것을 믿으며 살아서 주를 보게 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기 때문에 세상 기준으로 미친 사람처럼 살 수 있고 부활을 믿기 때문에 절망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부활을 믿는 근거는 첫째가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이며 둘째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직히 말해 연약한 내 이성(理性)으로는 백프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이성의 범위가 얼마나 비좁고 내 인식의 범위가 얼마나 얕은가를 잘 알고 있기에 내 이성이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등의 문제를 일으킬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영웅이었던 류 웰레스도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죠. 

 

그는 자기 이성으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부활에 대해 단순히 거부의 몸짓만 한 게 아니라 책을 쓰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주일이면 성경과 찬송가를 옆구리에 끼고 교회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불쌍하게 여겨지기 시작해 어떻게든 그들을 무지몽매(無知蒙昧)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천재에 가까웠던 자기 친구 로버트 잉거솔과 함께 미국 전역의 도서관을 다니며 예수와 부활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믿기를, 자료만 제대로 모아 분석하면 이 미친 짓의 정체가 드러나리라고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자료를 모아 철저히 분석하면 할수록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 곤혹스러워 졌다고 합니다. 

 

그래도 고집을 부려 원래 쓰기로 했던 책의 제 일장까지 쓰고 계속해서 이장을 쓰다가 도저히 더 나갈 수 없다는 양심의 지적 앞에 철저하게 무너져 버린 뒤 예수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그 후 류 웰레스가 쓴 책이 바로 그 유명한 ‘벤 허’입니다. 

 

벤 허는 유대인인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을 얻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기록한 소설이죠. 

 

벤 허가 유명해진 뒤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 이는 윌리엄 와일러라는 감독이었습니다. 

 

그가 영화 시사회장에서 

 

“오, 하나님 제가 정말 이 영화를 만든 게 사실입니까?” 

 

라고 물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가 되었죠. 

 

 

 

 

나 또한 류 웰레스와 로버트 잉거솔 만큼 치열하게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수많은 질문들과 의문들 앞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단지 웰레스와 달랐던 점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이 역사적으로 진짜인가? 라는 물음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 내가 태어난 게 우연이고 이 세상은 진화론의 주장처럼 우연으로 시작해서 우연으로 끝나는 것인가? 라는 물음으로 내 믿음의 근거를 삼기 시작했다는 것. 

 

 

 

 

우연과 필연, 예정과 유기(遺棄) 사이에서 나의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화론자인 칼 세이건이 진행했던 코스모스라는 우주 다큐멘터리도 나의 믿음을 확정하는데 가세(加勢)를 했죠. 

 

나의 삶과 죽음이 우연이라면 저 방대한 우주의 탄생과 죽음도 우연이어야 한다. 그러나.... 

 

나의 삶과 죽음이 자연의 법칙에 기대고 있는 것이라면 자연이 나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데 자연 또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면 어찌 자연의 법칙에게 내 생사화복(生死華服)을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코스모스라는 우주 다큐멘터리를 보기 이전부터 나는 코딱지만한 이 지구의 자연보다도 어마무지한 우주에 더 경외감(敬畏感)을 가져왔습니다. 

 

요 몇일 전에도 아폴로 우주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적지않은 감동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엘에이 흠스학교 개강을 주관하기 위해 머물렀던 파사데나의 한 호텔이었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안은 어두운데 혼자 있다는 외로움이 조금씩 어깨를 누르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면 갑자기 보고 싶어지는 내용을 만날 때가 있잖아요. 그 때가 그랬습니다. 다큐멘터리 보다는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더구나 그렇게 낯 선 땅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나 바라보며 있어야 하는 외로움을 다큐멘터리로 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기도와 묵상 시간 후 미국 케이블 티브이에서는 뭘 하나싶어 채널을 돌리다가 만난, 달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나에게 적지 않은 통찰력(洞察力)을 제공했습니다. 

 

 

 

 

미국이 왜 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에서부터 미국이 왜 달에 가려고 그렇게도 애썼는지, 그래서 어떻게 달 착륙에 성공했는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다큐였습니다. 

 

 

 

 

물론 미국 국민이라면 자부심을 느낄만한 내용이었죠. 

 

그러나 미국 국민도 아니면서 그 다큐에 빠져들어 간 건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습니다. 

 

소련(지금의 러시아) 때문이라고 했지요. 

 

미국이 그렇게도 달 개발을 서둘렀던 것은 소련과의 경쟁에서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으로 유리 가가린이 우주 궤도 비행에 성공한 뒤 미국 여론은 이러다가 모든 영역에서 소련에 밀리는 거 아니냐고 들끓어오르기 시작했고 영민(英敏)했던 케네디는 미국민을 자부심으로 똘똘 묶어내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끌어들여 달 여행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야 만 것이라고 다큐멘터리는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 프로에는 달에 갔다 온 사람들 전부가 인터뷰에 동원됐는데 그 중 내가 아는 사람은 암스트롱과 콜린스 등 두 세명에 불과할 뿐 거의가 모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와 그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지루했죠. 백발이 허연 할아버지들이라 말도 느릿하게 하고 자막도 없이 영어로만 들어야 하는 프로그램이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끌려 캘리포니아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흠스 개학식을 인도하기 위해 호텔방을 나가야 할 때까지 그야말로 정신없이 보고 있었습니다. 

 

 

 

 

달에 관한 이야기 

 

달에 관한 영상 

 

달에 가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달에 가는 과정을 필름에 담았다가 보여주는 내용이 전부인데 한 시간 이상을 꼼짝 않고 그 프로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아폴로 구혼가 십호의 승무원들이 처음 달에 가면서 유리창으로 찍은 지구의 모습이 떠오를 때는 소리를 지를 뻔 했습니다. 

 

“내가 지구를 바깥에서 본 건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오랜 시간의 혹독한 훈련 끝에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가 새까만 우주 위로 떠오르는 지구를 봤을 때 처음 드는 생각은 아름답다가 아니라 유리구슬같이 너무도 연약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아폴로를 탄 그 우주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 날 텔레비전에서 본 지구는 그랬습니다. 

 

내가 봐도 마치 내 어릴 적 마당에서 갖고 놀던 구슬처럼 지구는 연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아마 그 때의 카메라가 지금처럼 세련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인위적으로 가공한 색깔은 전혀 없이 우주선 창문을 통해 찍은 지구는 드넓은 우주에 혼자 떠있는 유리구슬처럼 보였습니다. 

 

파란색과 갈색과 하얀 색이 어우러져 천천히 돌아가는 유리구슬 

 

칠흙같이 새까만 우주의 어둠을 바탕으로 반달처럼 떠오른 지구는 어찌 보면 너무 작아 앙증맞기도 했습니다. 

 

따져보니 저 사진이 찍힐 무렵 나는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낡아서 소매깃이 헤어진 교복을 걸친 채로 게임용 구슬 만한 유리별의 한 귀퉁이에서 방황하고 다니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인생이 뭔지도 모르면서 헤르만 헷세를 읽고 죽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니체를 읽고 세상의 온갖 고민은 다 끌어안은 채 서울 변두리나 헤매고 있을 때였는데 미국의 저 할아버지는 우주선을 타고 날아가 암흑 속에 떠오르는 지구를 바라보고 있었다니. 

 

 

 

 

특히 아폴로 십삼호에 탔던 누군가(영어 알아듣느라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처음으로 우주에 가서 가진 느낌은 경외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시편 백이십일편을 외웠죠.” 

 

라고 말했을 때는 더 소리를 지를 뻔 했습니다. 

 

 

 

 

시편 백이십일 편은 내가 거의 외우는 성경 아닙니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나를 지켜 낮의 태양이 해하지 못하게 하시며 밤의 달도 상하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대략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달에 가서 그들이 처음 외친 게 그 시편 백이십일 편이었다니. 

 

 

 

 

경외감(敬畏感). 

 

아폴로 우주인이 느꼈던 경외감. 

 

칼 세이건이 텔레비전에서 코스모스를 진행할 때는 형편없이 어릴 때였죠. 

 

그 때도 우주에 관한 묵상이 불가능하지 않았지만 이번처럼 우주가 깊이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때는 우주 전반에 관해 다루었고 지금은 겨우 지구 옆에 붙어있는 달 하나에 관해 다룬 다큐멘터리였는데 오늘 나는 그 때와 달리 이 우주를 계획하고 만들고 운행하는 거대한 손길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다른 종교가 우주의 기원에 관해, 인류의 생성에 관해, 나의 삶의 목적과 부활에 관해 성경처럼 자세히 써놨더라면 내 인생은 약간 더 복잡했을 겁니다. 

 

다행히도 성경 외에는 그런 내용을 정확히 기록한 책이 없어 나의 선택은 비교적 쉬웠다고 해야 할 겁니다. 

 

 

 

 

물론 지금도 부활이 백프로 믿어지는 건 아닙니다. 

 

나의 믿음은 너무 추상적이고 제한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을 나의 믿음으로 증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나는 선택(選擇)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선택해야 한다면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 

 

부활이 있음을 알려준 하나님은 지금도 존재하시며 이 우주를 운행해 가시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넓고 넓은 우주 저 편에 누가 있는가? 

 

나의 삶은 우연으로 시작되었으며 여기서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가? 

 

 

 

 

수많은 질문 앞에서 그네를 타듯 흔들리는 나의 고민들. 

 

 

 

 

문제는, 부활을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 몫이지만 자유는 우리 몫이 아니라는 겁니다. 

 

문제는, 올바른 선택을 해야만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과 내가 틀림없이 죽는다는 사실. 죽은 다음 부활할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계시의 덕분이긴 하지만 나는 이것을 아주 탁월한 선택이라고 부릅니다. 

 

도마라는 사람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할 리 없는 회의론자(懷疑論者)가 아니었던가요. 

 

물론, 내가 선택하기 이전에 그것이 진리였음도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음으로 해서 진리가 안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든 안하든 여전히 진리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완벽하진 않지만 이것은 진리에 대한 나의 이성적(理性的) 반응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자유로운 건 진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에는 자유케 하는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나를 죽음의 공포에서 구해준 것은 바로 그 진리로부터 오는 자유였는데 그것은 내가 진리를 선택한 이후에 찾아온 자유였습니다. 물론 그 자유가 나의 상처로부터 비롯된 두려움으로 여전히 손상을 입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유 자체가 손상을 입는 건 아닙니다. 다른 무엇보다 분명히 고백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부활을 믿기 전과 믿고 난 후 나의 가치관은 전혀 달라져 버렸다는 사실. 흔히 애벌레와 나비를 비교하듯 나 또한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환되었음을 믿기에 내가 가진 모든 가치(價値)는 애벌레가 아니라 나비 수준으로 바뀌었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애벌레 때는 기어 다니는 것 밖엔 못했죠. 그러나 이제는 날아다닙니다. 이따금 떨어질 때가 있긴 하지만, 분명히 말해 나의 가치관의 영역은 이제 땅이 아니라 하늘의 영역이 되어버렸습니다. 땅에는 땅의 법칙이 있고 하늘에는 하늘의 법칙이 있는데 나는 하늘의 법칙에 속한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끔씩은 땅의 그것들이 그리워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나는 분명히 하늘에 속한 자가 되어 하늘의 법칙대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날개가 문제겠죠. 

 

류 웰레스나 로버트 잉거솔처럼 인식은 하늘의 것으로 바뀌었는데 영혼에 날개가 없다면 진리는 추상적이 되거나 비일상적(非日常的)인 것이 되어 철학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겠죠. 또 날개가 있다 하더라도 금방 해어져 너덜거린다면 하늘을 나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기대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겠죠. 

 

부연(敷衍)하자면 나의 날개는 통찰력에 기인하여 날마다 힘을 얻고 새로워집니다. 

 

통찰력은 영어로 Insight라고 하는데 계시(啓示)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계시는 말하자면,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주신다는 뜻이죠. 

 

계시는 인간의 한계성(限界性)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한계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계시는 임하지만(一般啓示) 계시를 계시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계시는 더 이상 계시(特別啓示)가 되지 못하는 약점도 있습니다. 

 

똑같은 사물이나 사건을 봤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통찰력으로, 또 어떤 사람에게는 우연으로 작용한다는 게 재미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은 우연을 믿느냐 통찰력에 의한 섭리(攝理)를 믿느냐로 나뉘어지는 거죠. 

 

 

 

 

여기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부활은 계시의 산물이지 명상(冥想)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 

 

요즘 뉴에이지에 심취한 사람들이 명상을 강조하고 명상을 가르치고 명상센터를 짓느라고 난리도 아닌데 얼마나 답답하면 저러나 싶기도 합니다. 인간이 명상해서 알 수 있는 거라면 굳이 진리라고 부를 가치도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어마어마한 우주에 주머니 속 구슬 하나로 달랑 떠있는 지구에 새끼개미처럼 붙어 살면서 내일 일은 커녕 한치 앞도 모르는 존재가 손가락 구부리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한다고 해서 깨달아지는 진리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그토록 처절하게 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랍니까. 

 

 

 

 

하버드를 수석으로 나왔다는 잉거솔이 주장한 게 바로 그거였습니다. 

 

예수가 정신병자요 사기꾼이 아니거나 미치지 않았다면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자청했을 리가 없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가짜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다. 사실 잉거솔이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기독교가 생겨난 건 십자가 사건 이후였으니까요. 베드로도 바울도 요한도 바둘로매도 십자가 이후에 참된 제자가 되었으니까요. 십자가 이전과 이후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걸 눈치 챈 천재 잉거솔이 눈엣가시같은 기독교를 무너뜨리려면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네, 맞아요 예수 십자가 사건은 가짜다 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잉거솔과 웰레스는 그토록 역사적 자료를 찾아 헤매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헤맴은 구원을 찾는 거룩한 여행이 되고 말았지만..... 

 

 

 

 

십자가 하니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그 당시 십자가는 지독한 혐오의 상징이었다는 겁니다. 밥 먹던 사람에게 십자가라는 말만 꺼내도 그 자리에서 토할 정도로 혐오의 상징이었던 십자가. 그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었을 때 제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죠. 그 때 까지만 해도 인간적인 계산으로 따랐던 것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도 위대할 게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게 때로는 위안을 주죠. 하나도 위대할 게 없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바뀐 게 십자가 이후의 부활사건이었으니 만약에 그 때 그들이 부활을 경험하지 않고도 그렇게 완전히 바뀔 수 있었을까요. 아마 잉거솔은 그래서 십자가 사건 보다 부활 사건을 더 집중적으로 연구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인가. 

 

그 물음 앞에 진지해질 수 있다면 진리에 한 걸음 가까워진 것이라고 나는 단정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한 번 죽으면 그만이라는 사람과 죽은 이후에 부활이 있다고 믿는 사람과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이랍니까. 

 

이렇게 엄청난 질문을 올해에도 대강 넘겨 버리려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건 바로 이것입니다. 

 

“까르페 디엠(기회를 잡아라)” 

 

류 웰레스와 잉거솔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샅샅이 조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부활이 거짓말이라면 십자가도 거짓말입니다. 

 

 

 

 

예수를 아주 가까이서 지켜 봤던 세례요한도, 나다나엘도, 베드로도, 마르다도, 도마도 부활을 목격한 이후에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한경직도 김활란도 윤동주도 최춘선 할아버지도 어거스틴이나 마르틴 루터 킹도 부활을 믿고 죽었습니다. 십자가가 역사(歷史)이듯이 부활도 역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 사건을 법정으로 가져가 조작설 위증설 환생설 착각설을 주장하며 부인해 보려 했지만 수없이 많은 증인들에 의해 기각(棄却)당해 버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만큼 증인이 많은 종교가 또 어디 있습니까. 다른 종교에서는 창시자를 빼도 종교가 살아남지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빼면 아무 것도 안 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가짜라면 예수를 믿은 수많은 사람들은 가짜에게 속아 자신을 내 준 불쌍한 존재들 아닙니까. 가짜를 위해 불에 타 죽고 목이 잘려 죽고 끓는 물에 들어가 죽다니. 가짜를 위해 밀림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 식인종에 잡혀 먹다니. 가짜를 위해 자신의 전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평생을 맨 발로 걸어다니며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다니. 

 

 

 

 

벤 허를 쓴 류 웰레스도 처음엔 기독교인을 그렇게 불쌍한 자들로 보았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창조를 믿으십시오. 

 

도대체 이 어마어마한 우주가 우연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는 믿음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다니요. 

 

달에 가기 위해 미국이 쏟아부은 엄청난 돈과 인력을 생각해 보십시오. 미국 나사(NASA)에 가보셨습니까? 나는 가봤습니다. 텍사스에 강의하러 갔다가 휴스턴에 있는 미항공우주국에 들러 하품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돈을 들여 인간이 이룩한 업적이 도대체 무엇이랍니까. 개미 한 마리가 학교운동장을 종일 돌고 와서 난 지구를 봤어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답니까. 그래도 내가 텔레비전에서 본 우주인들은 거의가 양심적이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아도 겸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겨우 달에까지 갔다 와서도 엄청난 경외심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경외심이란 인격적인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요사이는 피조물에 불과한 자연을 놓고 가이아 神이니 우리들의 어머니니 하고 떠드는 명상전문가들을 보면 우습다 못해 처절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왜 인격적인 아버지를 두고 저렇게 비인격적인 대상에 목을 매달까. 아버지가 그토록 싫은 건 죄 때문일까 속임수 때문일까. 지구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는 얘기는 과학이 발달하기 훨씬 이전에 성경에 이미 기록된 내용이고 창세기의 기록처럼 인간은 흙으로 지어진 존재에 불과한데 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분이 아직도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를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왜 그토록 외면하고 싫어하는 것일까 

 

 

 

 

이미 숱한 류 웰레스나 로버트 잉거솔 같은 사람들이 부활은 가짜라고 외치다가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무릎을 꿇었는데 여전히 그 아류(亞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둔일까 고집일까. 

 

 

 

 

그래요. 계시가 필요하죠. 

 

계시가 없는데 부활을 그대로 믿기란 불가능하죠. 

 

여기서 한 가지 알려드리고 싶은 건 계시는 철저히 성경에 의존한다는 것 

 

성경을 읽지 않았는데 계시가 임하는 건 아주 특별한 경우라는 것 

 

그러므로 부활을 믿으려면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믿으려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 내용이 어렵다면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몇 개의 단어만 빼놓고는 성경은 우리가 이해하는 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천년 삼천년 전에 기록된 내용이지만 성경은 성령 받은 사람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동일한 성령을 받은 사람에 의해 얼마든지 재해석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몰라서 못 읽는 거라면 제가 얼마든지 도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제 이메일로 연락을 주시면 기꺼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제발 운명이 왔다갔다 하는 중대한 얘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어쩌다 이 책을 읽게 되셨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잠깐이라도 부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당신은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죽음이 결코 다가 아닙니다.” 

 

“부활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날개를 다십시오.”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가 되십시오.” 

 

“오늘이 끝이 아니고 여기가 끝이 아님을. 꼭 믿으십시오.” 

 

 

 

 

그것이 저를사랑해 주시는 당신께 오늘 제가 드릴 수 있는 최대의 선물입니다. 

 

 

 

 

기도제목 

 

1. 계속해서 HMMS학교가 늘어나는데 저희가 잘 섬길 수 있도록 

 

2. 5월 한달간 국내 주요도시를 돌며 직면학교로 섬기려고 합니다. 협력교회와 모든 일정을 주관해 주시도록 

 

3. 사무실 이전문제와 재정문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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