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편지

자기 앞의 생

작성자
Peter
작성일
2012-03-20 10:05
조회
622

자기 앞의 생-사랑과 재활용의 의미에 대하여

 

<그녀는 계속해서 일을 해야 했다. 그녀는 거기가 녹음실이라고 내게 설명해주었다. 화면의 등장인물들은 말을 하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목소리를 불어넣어주는 것은 그 녹음실 사람들이었다. 어미새들처럼. 그들은 등장인물의 목구멍 속에 소리를 심어주고 있었다. 순간을 놓쳐서 목소리가 제때에 나오지 않으면 다시 해야 했다. 그러면 멋진 일이 벌어졌다.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서 살아 있을 때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단추를 누르자 모든 것이 뒷걸음질쳐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자동차들이 거꾸로 달리고 개들도 뒤로 달리고, 무너졌던 집이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시체에서 총알이 튀어나와 기관총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살인자들은 뒤로 물러서서 뒷걸음질로 창문을 훌쩍 넘어 나갔다. 비워졌던 잔에 다시 물이 차올랐다. 흐르던 피가 시체의 몸으로 다시 들어가고 핏자국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며 상처도 다시 아물어버렸다. 뱉은 침이 다시 침 뱉은 사람의 입으로 빨려들어갔다. 말들이 뒤로 달리고 팔층에서 떨어졌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창문으로 돌아갔다.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나는 튼튼한 다리로 서 있는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를 떠올렸다. 나는 좀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 아줌마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에밀 아자르, 정확하게 말하면 로맹 가리라는 프랑스 작가가 쓴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한 부분입니다. 어떤 내용인지 벌써 감이 느껴지지요? 이 소설에 대해 벌써 두 번째 언급을 하게 되는군요.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스물다섯 살 때입니다.

어찌나 강력한 인상을 받았던지 아직도 이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뛰곤 합니다.

 

<모모야, 그들은 나를 억지로 살려놓으려 할 거다. 병원이란 원래 늘 그 모양이야. 하긴 법이 그러니까... 나는 필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이제 더 살 필요가 없어. 아무리 유태인이라도 한계가 있는 거야. 그들은 나를 죽지 않게 하려고 온갖 학대를 다 할 거다. 의사는 처방전이라는 걸 가지고 있어. 그들은 끝까지 괴롭히면서 죽을 권리조차 주지 않을 거야. 그것이 그들의 특권이니까. 내 친구 중에 유태인이 아닌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교통사고로 팔다리를 다 잃었어. 그런데 병원에서는 순환계를 연구한답시고 십 년씩이나 그를 병원에 잡아두고 고생을 시켰지 뭐냐. 모모야, 나는 의학적 연구를 위해서 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정신이 들락날락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의학적 공헌을 위해 그런 상태로 수년씩 더 살고 싶지는 않다. 자, 그러니 나를 병원으로 옮긴다는 소문이 오를레앙에서 들려오면 네 친구에게 부탁해서 내게 주사를 한 대 놔주렴. 그리고는 시골에 내다 버려줘. 숲에다 버려줘. 아무데나 버리지는 말고. 전쟁 후에 한 열흘간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데 공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구나. 내 천식에는 도시보다 그곳이 훨씬 좋을 거야. 내 엉덩이를 삼십오 년 동안 손님들에게 내주었는데, 이제 와서 또 의사들에게 내주고 싶지는 않아. 약속해주겠지?"

"약속해요."

"카이렘?"

"카이렘."

카이렘은 유태어로 '당신에게 맹세한다'란 뜻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약속이라도 했을 것이다. 아무리 늙었다 해도 행복이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니까...>

 

이 소설을 읽어 내려가노라면 아무리 밑바닥 인생이라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말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모 뿐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은 파리의 밑바닥에 살아가는 군상群像들입니다. 에밀 아자르는 어쩌면 그리도 최하위 인간들의 심리를 잘 묘사했는지요. 공쿠르상 수상작이 아니었대도 자기 앞의 생은 읽는 것 만으로도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창녀였던 어머니와 포주였던 아버지에게서 버려진 아이로 최하류最下流의 조건에서 태어나,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층 건물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어린 아이 모모. 슬픔과 허무 또는 절망 앞에서도 어른보다 더 깊은 사색을 할 줄 아는 모모. 사랑하는 것만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인줄 알고 살아가는 아이 모모. 그러나 유난히 예민하고 여린 모모의 가슴은 그 어떤 제약 없이 너무도 쉽게 상처를 받아,

자기 앞의 생이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던 이유는 모모의 삶이 나의 삶과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모모와 나의 동질성은 구겨짐이라는 단어였지요. 구겨질대로 구겨진 어린 시절 앞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독한 사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할 것인가... 말하자면 사랑과 재활용에 대한 명상이라고나 할까요.

 

어떤 독자는 자기 앞의 생에 대한 감상문을 쓰면서, 삶이라는 게 결코 녹록치 않음을 열네 살 모모에게서 배웠다고 했습니다. 모모를 통해서 열네 살 소년이 겪을 수 있는 '이러한 생'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서, 어쩌면 우리 모두는 약간의 모양만 다를 뿐, 비슷한 생을 사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독자는 <자기 앞의 생生>에 대해 무척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생이 우연히 주어졌다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더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로자 아줌마는 잘못 전해진 꽃을 받고 무척 기뻐했다. 샤르메트 씨가 착각을 하지 않았다면 로자 아줌마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꽃 선물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생이 우연히 주어지듯이 기쁨도 예상하지 못했을 때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 대부분이 로자 아줌마가 더 살지 않고 죽기를 바랐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파티를 열려고 했다. 바나나, 암탉, 망고, 쌀을 가져왔고 신부님도 참석했다. 카톨릭 신부가 얼쩡거린다는 말을 듣고 오래 전부터 로자 아줌마를 알고 있던 랍비는 그녀가 혹시 기독교로 개종을 한 뒤 임종을 할까봐 얼른 달려왔다. 그들은 두 개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중립지대의 화젯거리인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국가마다 신성한 민족자결권이 있듯이 로자 아줌마에게도 신성한 자결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들을 즐겁게 해 주자고 로자 아줌마를 식물처럼 살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로자 아줌마가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는 의사는 더럽고 멍청하며 반드시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그건 범죄라고도 말했다. 나는 네 살을 더 먹은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카츠 선생님은 ‘모모는 매우 영리하고 예민한 아이이기 때문에 훌륭한 시인이나 작가 아니면 반항아가 될 거’라고 말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 하지만 안심해라. 네가 정상이 아니라는 말은 결코 아니니까."

"나는 절대로 정상은 안 될 거예요. 선생님. 정상이라는 작자들은 모두 비열한 놈들뿐인걸요."

"네가 정상인임을 말하는 거다."

"나는 정상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예요. 선생님……"

 

자기 앞의 생을 쓴 로맹 가리는 19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여러 잡지에 단편을 기고하다 <유럽의 교육>으로 1945년 비평가상을 받으며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1956년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1962년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 미국에서 최우수 단편상을 수상하면서 프랑스 문단에서의 명성을 확고하게 구축했습니다. 그리고는 너무나 유명해진 자신에 대한 외부의 기대와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순 살이 되던 1974년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그로칼랭>을 발표합니다. 이 작품으로 그는 또 한 번 프랑스 문단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게 되지요. 평론가들로부터 ‘아자르는 파리 좌안左岸의 고골리, 어둠에 잠긴 파리의 푸슈킨’이라는 찬사를 받는 것도 모자라, 다음 해 역시 같은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해 공쿠르 상을 수상합니다. 원래 공쿠르상은 같은 사람에게 두 번 이상 안 주는 게 원칙인데 심사위원들은 에밀 아자르가 실제인물인 줄 알고 이 같은 실수를 한 것입니다.

로맹 가리는 수줍음이 많고 순종적이며 혼자만의 문제에 골몰해 있는 내성적인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에 가담하여 공군으로 복무했고 그 공으로 종전 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후 외교관이 되어서도 소설을 발표하다가 1944년 30세에 열일곱 살 연상의 레슬리 블랜치와 결혼합니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후에는 영화배우 진 세버거와도 지내는 등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와 레슬리와 16년간의 결혼 생활을 청산한 뒤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이라는 이 유명한 소설을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로맹 가리와 별거했다가 화해한 진 세버거는 안타깝게도 과음 후 치사량의 약물 투여로 자살을 하고 말지요.

프랑스라는 문명국가에서 한사람이 두 개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그토록 오랫동안 명성을 유지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을 동시에 속일 수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라는 두 문학적 정체성 사이에서 기묘한 줄다리기를 해나가던 그는 자신이 에밀 아자르라는 내용을 밝히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지요. 66세가 되던 1980년 12월 2일 오후, 몇 달 동안 집필을 중단해오던 그는 입 안에 권총을 넣고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입니다.

그의 자살도 충격이었지만 그가 남긴 유서를 통해 에밀 아자르가 실은 로맹 가리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 세계 문학계는 일대 혼란에 빠집니다. 특히 공쿠르상을 심사하는 심사위원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로맹 가리가 죽기 전 친구에게 했다는 이 말은 지금도 나를 혼란케 합니다.

<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무명이었을 뿐이네>

정말 로맹 가리는 천재인 동시에 정체성이 모호한 작가였을까요. 그는 정상적인 사람들을 속이는 데 대한 희열을 최고조로 유지하기 위해 자살을 택한 것일까요. 자기가 만든 주인공들은 아무리 비천한 삶 속에서도 사랑을 하며 살아가게 만들어놓고 왜 자신은 정작 자살을 하고 만 것일까요.

 

"…… 하지만 안심해라. 네가 정상이 아니라는 말은 결코 아니니까."

"나는 절대로 정상은 안 될 거예요. 선생님. 정상이라는 작자들은 모두 비열한 놈들뿐인걸요."

 

소설 속에 나오는 모모는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역동성을 느껴질만큼 내면의 묘사가 탁월해서 처음 얼마동안은 실제로 모모가 내 곁에 살아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나의 꿈 가운데 하나는 은퇴 후 소설을 쓰는 것인데(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신 서울 영동교회의 정현구 목사님은 나를, 맥스 루케이도보다 더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칭찬해 준 일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 본격적으로 소설을 쓴다면 모모와 같은 인물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모를 통해 내가 이 작품에서 받은 감동은 사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비천한 삶이라도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 아무리 최하층의 사람이라도 사랑할 힘은 가지고 있다는 것.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린 모모와 하밀이라는 할아버지 간에 오가는 짧은 대화는 모모가 얼마나 사랑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인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대답에 울음이 터질 정도로 모모는 사랑을 품은 아이입니다. 삶이 모모 정도가 되면 사랑은커녕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해야 하건만 모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모모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독자는 모모의 캐릭터에 쉽게 동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마치 큐티하는 사람이 느헤미야와 나오미에게 동화되어 가듯이.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이렇게 썼더군요

<그저, 사랑해 주어야만 한다. 사랑해야 한다. 온 힘을 다해서. 자기 앞의 생을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 포기해선 안 된다. 비록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생이어도, 원망만 할 수 있는 조건이어도, 사랑해 주어야 한다.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생은 누구도 비난할 수 없고 아무도 비난 받을 수 없다.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고 비난 받을만한 생도 없다.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비난할 수 없다.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고 막 다루어서도 안 된다. 생은 고귀한 것이기에. 누가 뭐라든지 생은 소중한 것이기에 상처를 주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모모가 종종 어둠 밖의 생을 기웃기웃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자기 생이 아니었다. 모모에게 돌아갈 곳은 악취를 풍기며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의 품이었다. 모모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것을 사랑한다. 모모는 너무나 그녀를 사랑했기에 심지어 시체가 된 그녀와 삼주일이나 지하실에서 더불어 살기까지 하는 것이다>

 

어떻게 시체와 삼주일을 보낼 수 있지? 그것도 어두운 지하실에서... 혹시 모모는 변태가 아닐까? 에밀 아자르가 말하려고 하는 사랑은 이미 정상의 범위를 넘어선 게 아닐까? 그러나 나는 모모의 행위를 비판하기보다 내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사랑의 종교를 믿고 따르면서도 그리스도와 이웃을 이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입니다. 특히 모모와 같은 아이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큽니다. 오늘도 아프리카 어디에서는 밥을 못 먹어 굶어 죽어간다는 아이들의 사진이 내 눈 앞을 스쳐 지나가고 부모가 가출한 단칸방에서 병 든 할머니와 살아가는 소년소녀가장의 이야기가 대문짝만하게 난 신문을 보면서도 흔적조차 없는 가슴에 부끄러움을 가질 뿐입니다. 비판의 안경을 쓰고 보면 모모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입니다. 정상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모모는 이상한 아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흠스를 하고 나서인지 모모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예전 같지 않아졌습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주제만큼 거듭난 사람에게 도전을 주고 희망을 갖게 하는 단어가 또 어디 있던가요? 우리의 정체성은 사랑이라는 한마디로도 충분히 검증되는 것 아닌가요?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글을 써야 하는 나에게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일종의 큐티책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상을 이야기하면서도 상투적이지 않은 표현, 과장법을 쓰지 않으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화법.

특히 회교도인 모모의 아버지가 찾아왔다가 로자 아줌마의 거짓말에 속아 아들이 유태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심장마비로 죽는 장면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릿하게 합니다.

 

어느 날 유세프 카디르라는 사람이 로자 아줌마를 찾아와서 11년 전에 맡긴 아들 모하메드를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는 모모의 아버지였으며 철저한 회교도인이었습니다. 병을 앓고 있는 로자 아줌마는 착각으로 그의 아들을 유태인으로 키웠다며 모세를 소개합니다. 그러자 카디르는

"원래대로의 내 아들을 돌려주세요. 유태인은 싫어요. 온전한 회교도인 내 아들을 돌려달라구요!"

"아랍인이건 유태인이건 여기에서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정말로 아들을 원한다면 지금 그대로의 아이를 받아들이세요. 아이 엄마를 죽여 놓고, 자기가 정신병자라고 자처하더니 이제 아들이 유태인으로 컸다고 난리를 하는군요. 모세야, 네 아빠에게 가서 키스하렴. 그래서 네 아빠가 죽는다고 해도 아빠는 아빠니까!"

"어쩔 수 없잖아."

머뭇거리는 모세를 보며 옆에서 내가 거들었다. 나는 네 살을 더 먹게 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괜찮아졌다.

모세는 유세프 카디르 씨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자 남자는 자기 말이 맞다는 것도 모른 채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얘는 내 아들이 아니야!"

그리고 다음 순간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문 쪽으로 한 발짝을 내디뎠는데 그의 의지는 바로 거기에서 꺾여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몸은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아! 하는 짧은 비명에 이어 으! 하고 소릴 흘리더니 왼손을 심장께에 대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지고 만 것이다>

 

모모의 인생에서 또 한 번의 비극이 발생하는 순간입니다.

모모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 이렇게 단번에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모모의 아버지 유세프 카디르 씨는 유태인 아들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면서 그 사실에 대한 충격으로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경찰이 오면 매우 곤란하게 되니까 로자 아줌마는 그의 시체를 신분이 보장된 온전한 프랑스 사람이 사는 삼층 층계참에 끌어다 놓습니다. 놀라기는 모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다시 내려가서 죽은 유세프 카디르 씨 곁에 잠시 앉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지만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의 코는 내 코보다 훨씬 더 길었다. 하지만 코는 살면서 계속 길어지는 것이니까.

나는 무슨 추억이 될 만한 것이라도 있을까 하고 그의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주머니 속엔 푸른색 골루아즈 담배 한 갑뿐이었다. 담배갑 속에는 아직 한 개비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의 곁에 앉아서 그것을 피웠다. 그 담배갑 속에 있었을 다른 담배들은 모두 그가 피웠을 테니 나머지 한 개를 내가 피운다는 것이 뭔가 의미 있는 일같이 여겨졌으므로...

나는 조금 울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게도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이제 그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기쁘게 했다. 잠시 후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얼른 집으로 올라와버렸다>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였지만 그 아버지마저 죽었을 때 보여준 모모의 행동은 열 네 살의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아버지 곁에 앉아서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의 담배를 피우는 아들. 그 담배갑 속에 있었을 다른 담배들은 모두 그가 피웠을 테니 나머지 한 개를 내가 피운다는 것이 뭔가 의미있는 일같이 느껴졌다는 표현이 가슴을 에리게 하지 않습니까? 이 글을 읽고 나는 앞으로 담배 파우는 아이들을 정죄하지 않고 이해할 것을 결심합니다. 특히 길 가에 쓰러진 남자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이를 본다면 다가가 안아주리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합니다.

모모가,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저릿한 정서를 이 정도의 글로 표현한다는 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책은 '사랑해야 한다'는 간결한 문장으로 모든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여기서 '사랑해야 한다'는 문장이 갖는 감정은 교훈이 아니라 처절한 생의 몸부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에밀 아자르가 자기 앞의 생을 통해 우리에게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 사랑은 폐휴지처럼 구겨지고 망가진 사람도 재생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에밀 아자르, 아니 로맹 가리 때문에 누군가는 자살을 하고 로맹 가리 자신도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죽었지만 모모의 마지막 말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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