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편지

참 감사한 콘셉트

작성자
Peter
작성일
2021-05-03 11:06
조회
95

이 자리를 빌어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자녀 양육, 다음 세대 부흥을 위한 효과적인 사역 형태로 우리가 가진 콘셉트가 맞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복음사역, 회복사역, 문화사역의 융합입니다. 앞의 세 가지 사역을 통해 건강한 자녀, 즉 5 JESUS POWER가 살아나 조화와 균형, 우선순위가 지켜지는 양육이 가능하도록 부모를 도와야 한다는 내 생각이 맞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나타나는 열매들로 인해 확신은 깊어져 갑니다.

첫째 복음사역의 중요성, 사랑하는 자녀에게 복음을 체계적으로 먹여야 하는데, 먹이기는커녕 자기 자신부터 제대로 먹지 못하는 부모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율법주의 복음, 인본주의 복음, 혼합주의 복음 같은, 다른 복음, 틀린 복음을 먹여 자녀의 영을 시들게 만드는 부모들이 양육에 필요한 복음을 먹고 건강해지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둘째 회복사역의 중요성, 역기능 가정·역기능 교회·역기능 사회에서 받는 상처로 인해 도피와 반항의 그네를 타고 있는 아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도 이를 방치하는 부모가 정말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의 결핍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도 모르고 종교 생활을 강요하는 부모들에게 흠스 같은 회복사역을 소개할라치면 목사님이 교회 밖에 나가지 말랬다고 황급히 돌아서는 모습은 씁쓸함을 넘어 애통함을 느끼게 합니다. 오스 기니스의 통찰력에 의하면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셈이죠. 한국 개신교는 유통 기한이 끝났다며 맹렬히 공격한 장대익 교수 같은 분이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무슨 상처를 받았는지 그는 모태 신앙인으로 태어났으면서 리처드 도킨스와 찰스 다윈에 영향받아 한국 개신교를 통조림에 비유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중입니다. 아무튼 상처의 힘은 대단해 거듭난 사람조차 스스로 벽을 쌓고 그 안에 자기를 가두어 버린다고 부르스 탐슨이 말했습니다. 문제는 해결책입니다. 치유 사역 한다며 교인들 앞에서 ‘나는 알코올 중독자임’을 자랑처럼 외치게 하거나 ‘믿음만 있으면 된다’라는 설교로 무마하려는 지도자, 심리학에 기대려는 인본주의가 판을 치는 한 상처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회복사역의 문제는 정말 시급합니다. 일단 회복의 정의부터 수상한 게 너무 많습니다. 복음적 시각에서 보면 이단성이 농후한데도 치유라는 이름으로 쉽게 받아들이려는 기독교인이 정말 많습니다. 지성소에서의 직면은 상담이나 나눔과 비교조차 안 되는 해결책인데도 목회에 성공했다는 분조차 알아듣지 못하니 그 원인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신천지는 무서워하면서 인본주의는 허용하는 무지를 예수님이 뭐라고 하실지 궁금합니다.

상처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 옛날 다윗이 너무나 잘 보여 주고 갔습니다. 다윗만이 아닙니다. 성경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트라우마가 아닙니다. 결핍입니다. 이 결핍은 복음에 대한 간절함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력 공급을 방해하고 벽을 쌓게 해서 부정적 성격을 만들어 내게 합니다. 흠스나 틴즈 흠스 같은 사역 통해 회복의 바다에 들어가 보지 않고는 신앙 있다는 사람이 왜 자식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는지, 어떻게 자녀의 사랑을 빼앗아가는지조차 모른다는 이야기를 헛들으시면 안 됩니다.

회복은커녕 신앙 훈련이란 명목으로 상처를 덧나게 하는 부모가 너무나 많습니다. 어린아이를 강제로 순교자 프로그램에 보내 버리는 사람, 구속사도 모른 채 성경 암송만 하면 복 받을 거라고 우기는 사람, 상처를 있는 대로 주면서 율법 지키기를 강요하는 사람, 비싼 학비를 내고 사립 학교나 대안 학교에 보내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러다 어느 날 빵 하고 터지는 거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장대익 교수처럼 반기독교적이 되거나 죽어 버리겠다고 소리를 내지르면 그때야 정신이 들어, 그러나 나오는 건 한숨 뿐. 도피와 폭발, 거절과 반항의 그네에 올라타는 자식을 보다가 이어지는 곡소리.

셋째 문화사역의 중요성, 미디어와 세상 정신의 관계에 대해 나만큼 경고를 날린 사람도 없을 겁니다. 문화 극단주의자라는 비난까지 들어가며 왓처watcher로서 워닝warning을 한 사람도 드물 겁니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문제는 세속화 아닙니까? 속 넓은 체하면서 트로이 목마 작전에 말려들어 가는 사람이 왓처보다 대접 받는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교인이 교회당 밖으로 나가는 건 극도로 경계하면서 문화가 교회 안에 들어오는 건 팔 벌려 환영하는 목사님 이름 대라면 수백 명도 더 댈 수 있습니다. 그들 밑에서 아이들이 미디어와 세속화라는 방사능에 노출되어 하루하루 죽어 가는데도 책임질 사람 없다는 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사역이 하나님을 아는 사역이고 회복사역이 자기 자신을 아는 사역이라면 문화사역은 세상 정신이 무엇인지 아는 사역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안다는 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모르면 당하기 마련이니까요. 문화사역은 왓처로부터 시작해 가이드와 프로듀서로 발전해 나가는 사역입니다. 한국 교회는 왓처의 역할도 안 한 채 가이드와 프로듀서가 되려 하든지 아예 셋 다 안 하든지 극과 극입니다. 문화사역만큼 남용되고 오용되고 무시되는 단어도 없을 겁니다.

마르다형 봉사와 헌신에 길들여진 사람치고 낮은울타리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는 JPAJesus Power Academy나 NCSNajonwooltari Concentration School, 복음변증학교 GASGospel Apologia School, 틴즈 흠스나 키즈 흠스를 눈여겨보는 부모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통찰력과 분별력 없이 자녀를 키운다는 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해 줘도 마이동풍馬耳東風입니다. 정말 비극이지요.

복음과 회복과 문화. 참 절묘한 조합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그 효과를 맛보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그래서 더욱 귀하기만 합니다. 대중화와 대형화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 볼 만큼 보고 겪을 만큼 겪었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정말 중요한 건 세 글자 뒤에 반드시 ‘사역’ 자를 붙여야 한다는 겁니다. 사역이란 주님이 시켜서 하는, 주님의, 주님에 의한 훈련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사역은 하나님이 누구신가 아는 데 목표가 있고, 회복사역은 내가 누구인가 아는 데 있으며, 문화사역은 세상이 어떠한가 아는 데 있습니다.

복음사역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데서 시작이 됩니다.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신학이 있어야 합니다(데이비드 웰즈가 쓴 『신학 실종』은 매우 유익한 책입니다). 해석되지 않은 성경은 그냥 경일 뿐입니다. 복음사역은 복음을 먹는 데서 출발합니다. 잘 먹은 복음은 그대로 믿음이 됩니다. 믿음은 영적 지각력을 높이고 5 JESUS POWER,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생명력·통찰력·분별력·창의력·변증력 개념 없는 자녀 양육은 유혹의 사막에서 방황하게 만들 것입니다. 복음을 먹이지 못하는 부모는 식모나 보모일 뿐입니다.

회복사역을 위해서는 직면이 필수입니다. 직면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예배를 통해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의 마음을 지성소로 만드는 거룩한 과정입니다. 직면은 중언부언도 아니고 신세타령도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 하는 폭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아픈 과거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자신의 부정적 성격을 교환하려고 직면을 합니다. 친교실이 아니라 수술실에서 우주에 단 한 분 하나님이라는 의사로부터 정밀 수술을 받고 보혜사 성령의 생명력으로 충만하여 변증의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게 직면의 목적입니다. 올바른 직면은 올바른 사역에서 나옵니다.

다시 말하지만, 회복사역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우리에게 주신 흠스와 틴즈 흠스, 키즈 흠스를 살펴보기라도 해 주십시오.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일 장로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담임 목사께 물어라도 보십시오. 낮은울타리 흠스와 틴즈 흠스를 거쳐간 수많은 부모들과 아이들에게 일어난 결과를 찾아보십시오. 대중화하려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필요한 가정, 필요한 교회가 있을 겁니다. 특히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교회 어른이나 반항하는 자녀로 힘들어하는 부모라면 꼭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어설픈 끼·충·가·상·나(끼어들기·충고하기·가르치기·상담하기·나누기)로 직면을 방해하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부추기는 대신 순수히 지성소에 들어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돈도 안 들고 교회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가장 복음적인 회복사역에 참여할 수 있다면 뭘 망설입니까?

복음사역과 회복사역뿐 아니라, 문화사역에 대해서 나만큼 할 얘기가 많은 사람도 없을 겁니다. 처음 부름받을 때부터 문화사역에로 부름받았으니까요. 원래는 해외에 나가 선교하다 죽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낮은울타리 창간하게 되고 울타리 문화 선교회 만들게 되면서 주님은 최초의 문화 선교사로 파송까지 받게 하셨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 교회가 원하는 대로 강의하다 보니 왓처 역할로 이미지가 굳어지긴 했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낮은울타리 문화사역은 왓처가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고, 세상을 아는 것.

그래요. 우리가 세상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자칫 세상과 세상 정신을 혼동하여 세상을 사랑하라고 하셨던 주님의 명령마저 무시하기 쉽습니다. 세상은 사랑하되 세상 정신을 사랑하지 않으려면 문화사역의 정의와 범위를 제대로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화사역이 복음과 회복의 영역 안에서 움직이게 했습니다. 세 사역이 융합된 상태로 자녀를 양육할 수 있도록 체계를 세웠습니다. 자칫 사역이라는 이름 하에 한 쪽으로 쏠리기 쉬워 조화, 균형, 우선순위라는 삼대 원칙을 세웠습니다. 정말 무서운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도 알고 나도 아는데 세상 정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정신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욕망입니다. 욕망은 무엇입니까? 예수의 신부에서 아담 군상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마취제 같은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버리면 영적인 눈이 멀게 되고 영적인 귀가 마비되며 영적 후각은 그 기능을 상실해 버립니다. 즉 거듭난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서 육에 속한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R. R. 톨킨이 이 상황을 <반지의 제왕>에서 제대로 표현해 놓았죠. C. S. 루이스가 흘려 준 통찰력이긴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수많은 캐릭터들 중 스미골 같은 캐릭터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미골만 이름을 두 개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스미골이 자신의 또 다른 이름 골룸과 내면세계를 놓고 다투는 장면은 정말 압권 아닙니까? 철부지 아이들은 로한 기병대와 오크들이 싸우는 마지막 전투 장면을 기억해 내고 무식한 부모들은 두 개의 탑이 무너지거나 호비톤 마을 축제를 좋다 하겠지만, 나는 단연 절대 반지를 훔치려는 골룸과 주인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우기는 스미골의 내면 전쟁을 명장면으로 꼽습니다. “Get away!” “I hate you!” “Not anymore!” “I don't need you!” “Leave now and never come back!” 이 다섯 문장은 스미골이 골룸을 물리치는 단계로, 교회 학교에서 영적 싸움을 설명할 때 가끔 인용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이 장면은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스미골이 골룸과의 싸움에 지게 되고, 스미골을 이긴 골룸이 운명의 산 용암 동굴에서 절대 반지를 빼앗으려고 눈을 부릅뜬 채 프로도의 손을 물어뜯는 장면에선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결국 프로도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쳐다보며 비명을 지르고 골룸은 프로도에 밀려 절대 반지를 손에 잡은 채 펄펄 끓는 용암으로 가라앉습니다.

스미골, 아니 골룸은 한 번 욕망의 덫에 걸리면 빠져 나오기 쉽지 않다는 걸 그토록 처절하게 보여 주고 갔습니다. <반지의 제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입니다.

그래요. 이게 웬일입니까? 거듭난 사람이나 거듭난 사람의 자녀가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약속한 풍성한 삶 대신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단체로 요한 일서에 경고하신 정욕, 욕망에 빠져드니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복음사역과 회복사역과 문화사역을 통해 생명력·통찰력·분별력·창의력·변증력으로 충만해져야 할 자녀가 썰물처럼 교회를 떠나고 미디어를 비롯한 각종 대체물에 중독되어 가는데도 이렇게 무기력할 수 있습니까? 부디 자녀를 살리고 싶은 분은 침묵만 지키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이제라도 복음사역·회복사역·문화사역의 효과를 누리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그 은혜를 생수처럼 흘려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달인데 여러 가지로 뒤숭숭한 요즈음, 그래도 멀리서 가까이서 우리 사역에 참여하여 건강한 모습으로 자라가는 부모들과 그들 자녀가 있어 많은 위로를 받고 소망을 품습니다.

이번 달에도 함께 가 주시는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후원 회원들께서는 홈페이지에 있는 자료를 마음껏 열람하시고 앞에 말한 세 사역의 현장에 우선 초대된다는 점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혜택을 잘 활용하여 자녀, 혹은 다음 세대를 올바로 양육하는 일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월간 낮은울타리 2021년 5월호 편집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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