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편지

성대한 결혼식이었습니다

작성자
Peter
작성일
2020-08-17 10:26
조회
162

야외에서 치러진 결혼식은 화려했습니다.
기독교인의 결혼식 중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보았습니다.
꽃값만 해도 수백만 원은 되었을 겁니다.
날씨도 좋아 저녁 해질 무렵 지정된 좌석에 앉아 있는데 마치 천국에 와 있는 듯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주례자로 올라온 신랑 아버지가 미리 나눠 준 주례사를 읽는데 기독교인 결혼식 맞나, 할 정도로 일반적인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몇몇 단어만 빼면 일반 결혼식장에서 듣는 주례사와 다를 바 없어 적지 아니 놀랐습니다. 신랑 신부는 물론 양가 부모는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유명인이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둘 다 실력 있는 의사요, 선교사와 목사로 주례자는 기독교 학교 설립자에 아프리카 봉사 단체 대장에 현직 목사에 유명한 생식 회사 이사장까지 겸하고 있는 분이라 다른 건 몰라도 주례사에 은혜 받으리라 내심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들어가는 입구에서 나눠 준 인쇄물을 읽는 순간부터 이분이 그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 맞나, 할 정도로 눈을 의심하게 했습니다.
‘인쇄물 내용은 이래도 주례사는 다르게 하겠지…’ 했는데 마이크를 잡더니 인쇄물 그대로 읽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를 자랑삼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 주례사는 성인 아이 이야기로 이어지더니 상처 이야기로 발전, 깊은 상처를 가지고 결혼한 남편은 아내의 지순한 사랑 덕분에 치료가 되었다는 이야기, 생텍쥐페리 이야기로 갔다가 MBTI를 통해 분석한 신랑 신부의 차이를 밝히면서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서로 맞춰 가야 한다, 본인은 대학 시절부터 마르틴 부버라는 철학자를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쓴 명저 ‘나와 너’ 때문으로, 그 책에서는 나와 너를 인격적 관계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살다보면 상대방을 목적화하고 수단화하기 쉬운데 너희 둘은 그러지 말아라. 나는 분당에 사는데 서판교 부분에 우리들 교회라는 교회가 있어 우연히 그 옆을 지나다가 벽에 걸린 플래카드를 보았는데 거기 ‘결혼의 목적은 거룩’이라고 써 있더라. 성경은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남편을 끝까지 신뢰하라. 남편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초월성과 합리성에 문화적 적절성 가진 복음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세상 속에 선포되어야 하는데 (너희가 그 일 해 주기를 바란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킹덤 드림)을 가진 공동체가 집단 영성과 집단 지성을 발휘하여 닥쳐올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 잊지 말아라. 마지막 시대에 주님이 빨리 움직이고 있다. 우리도 그 흐름을 타고 같이 달려야 한다. 이 모든 상황을 통해 역사는 세계 복음화와 하나님 나라 완성이라는 어젠다를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이 흐름에 동참하여 킹덤 드림을 가슴에 품고 주님과 같이 달려가는 부부가 되길 기도한다.

고급 종이에 인쇄해 나눠 준 주례사의 대략 내용입니다.
할 수 있으면 주례사 전문을 옮겨 싣고 싶었으나 대략의 내용만 전합니다.
내가 실망한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주례자의 명성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유명한 기독교 학교를 세워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분의 주례사라 더 유심히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분의 철학이 미래의 지도자 될 아이들에게 흘러갈 것이므로 다른 때와 달리 이 분의 말에 더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기독교인 결혼식에 가서 듣는 주례사는 거의 똑같아, “행복하게 잘 살아라, 싸우지 말고 살아라, 양보하고 살아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으니 그리 알고 살아라, 전도를 많이 하고 살아라,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여라, 애들 많이 낳아라” 인데 오늘은 다르겠지. 결혼의 의미를 깊이 다뤄 주겠지, 했는데 실망감만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토요일 바쁜 일을 제치고 그 멀리까지 차를 몰아 달려갔는데 주례사로 은혜 받으려는 생각이 날아가니 양고기, 소고기, 돼지고기가 맛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화려한 결혼식에 주례사가 그러니 남은 시간은 그저 어느 부잣집 잔치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

주례사를 상처 이야기로 시작해 참석자들의 주목을 끄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해결책은 MBTI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다림줄이 나오면 나왔지 MBTI가 웬 말입니까. 그가 말했듯이 우리의 문제는 사랑의 결핍으로 시작되는 것 맞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어떻게 채우느냐는 기독교인만 아는 비밀입니다. 그걸 밝혔어야 하는데 일반인의 심리학, 상담학 수준에 머무르거나 조금 나은 정도 같아 너무 아쉬웠습니다.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요. 폐부를 찌르는 한 방의 말씀.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밝힌 대로 기독교인의 결혼은 비밀 중의 비밀 아닙니까. 일반인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 아닙니까. 그 비밀의 내용은 우리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거듭난 자가 아니라 신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랑 신부 공히 그리스도의 신부 서약을 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사는 내용을 가슴에 되새기는 자리가 되어야 하는데 주례자는 그저 그렇고 그런 얘기로 귀중한 시간을 다 잡아먹었습니다. 일반인은 몰라도 기독교인의 결혼식에서 인간이 드러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 창조 이야기, ‘그러므로 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성도)의 이야기임을 소상히 밝혀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너희들은 서로 이해하고 받아 주는 부부가 되라는 이야기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지독하게 싸울 수도, 심지어 이혼할 수도 있음을 밝혀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주례자 자신은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살고 있으니 너희도 그리 살아라 식이 아니라, 예수의 신부가 어떤 존재인지를, 예수의 신부로 되어 가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알려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가서가 인용되어야 마땅하나 지금까지 아가서를 가지고 주례하는 목사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전부 창세기 2장 22절, 에베소서 5장 22절, 고린도전서 7장 10절, 히브리서 13장 4절, 요한삼서 1장 2절, 창세기 1장 28절, 마태복음 22장 18절에서 벗어나는 주례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정복하고 다스려라, 생육하고 번성하라’가 강조되면서 서로 사랑하는 부부, 선교하는 부부, 아들딸 많이 낳아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부부가 되라니 이게 웬일입니까.

거듭 말하지만 결혼은 엄청난 비밀입니다(엡5:32).
바울이 이렇게 강조한 이유는 기독교인만 알 수 있도록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결혼 이야기입니다. 창세기가 결혼 이야기로 시작되고 계시록이 결혼 이야기로 끝이 나는 건 결혼의 의미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성경 속 모든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에베소서 5장 32절로 연결됩니다. 결혼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결혼이란 둘이 힘을 합쳐 선교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결혼은 나의 진짜 신랑이 누구냐를 확인하고 경험하는 과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의 결혼 주례자는 의무적으로 이 비밀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신랑 신부가 훌륭하다느니 잘 생겼다느니 공부를 열심히 했다느니 부모에게 효도하고 서로 이해하며 행복하게 살라느니 따위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는 비싼 야외 결혼식이라 주례사 시간이 길어도 눈치 볼 필요 없었지만, 도떼기시장 같은 결혼식장에서 번개같이 치러지는 결혼식 주례를 그런 말들로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인 부부도 싸울 수 있습니다. 아니 싸워야 합니다. 지독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절망해야 합니다. 중요한 건 결혼식 때 들었던 결혼의 숨겨진 의미, 싸우든 안 싸우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됨을 배워 나가야 한다는 것. 서로에게 상처 받을 때 용서를 구하기보다 지성소에 들어가 직면해야 한다는 것. 변화보다 교체, 헌신보다 연합.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가서를 거쳐야 한다는 것.

솔로몬에게 아끼는 포도원이 있었죠.
솔로몬 왕은 그 포도원을 가까운 동네 사람들에게 관리를 맡겼는데 어느 날 변장을 하고 포도원 상태를 점검하려고 나섰었죠. 그때 넓은 포도밭에서 홀로 땀 흘리며 일하는 여인. 술람미라는 그 여인은 이복 오빠 둘과 어머니와 살고 있었는데 학대를 받아 매일 혼자 세 사람 몫의 일을 해야만 했었죠. 얼굴은 햇볕에 타고 머리카락은 덤불에 엉키고 피부는 거칠어 누가 봐도 귀티가 나지 않는 여인이었는데 솔로몬 왕은 그 일하는 모습에서 사랑을 느꼈죠. 얼마나 위대한 왕인지 모르는 여인은 그의 구애를 받자마자 “나를 흘겨보지 말라(아1:6)”라고 쏘아 붙였지만, 솔로몬은 그녀를 황금 마차에 태워 왕궁으로 데려와서는 화려한 결혼식을 치르고 왕비 수준에 맞게 지극정성으로 꾸며 주었죠. 서서히 술람미는 사랑에 눈이 떠가고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꿈같은 날을 보내지만, 왕비다운 왕비로 세워져 가기에는 난관이 많아, 어떤 날 술람미가 죽도록 보고 싶어 경비도 따돌리고 이슬을 맞으며 뛰어 온 왕에게 늦었다며 문을 열어 주지 않아 손목에 난 핏자국을 보여 주며 돌아서게 만들기도 했었죠. 솔로몬에게는 천 명 넘는 여자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왜 술람미만 좋아했을까. 왜 하나님은 ‘나에게 입맞춤을 해 주세요’ 같은 용어가 난무하는 아가서를 성경 중앙에 배치하도록 하셨을까. 왜 아들의 사랑, 종의 사랑, 청지기의 사랑, 제자의 사랑으로 못 다 받는 사랑을 신부의 사랑으로 채우게 하셨을까. 아무리 훌륭한 기독교인도 기껏해야 종의 수준이나 제자의 수준에 머물러 살기 쉬운데 결혼식에서만큼은 신부의 영성이 무엇인지 알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 다른 때는 몰라도 기독교인의 결혼식에서는 아가서를 읽기라도 해야 하는데 한 명도 그런 목사님은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나에게 십 분의 시간만 주면 나가서 잘 설명해 줄 수 있는데, 유명 인사가 바글거리는 틈에서 신랑 아버지의 당당한 주례사를 수그리 듣고만 있자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주례자는 몰라도 오늘 주례자는 자칭 타칭 성공한 기독교 지도자고 자칭 타칭 기독교 명문 가정이라 그 정도의 얘기는 해 줄 줄 알았는데 자기 자랑, 자식 자랑만 늘어놓아 정말 실망했습니다. 킹덤 가족이라고 자부하는 이가 이 정도이니 다른 이야 오죽하랴 싶기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그렇습니다.
오늘 이 책을 받아 보시는 분들은 그 엄청난 특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종으로, 청지기로, 제자로 살아온 분들은 속히 신부의 자리로 가시기 바랍니다. 사랑도 급수가 있습니다. 같은 왕궁에 거한다 해도 왕비로 받는 사랑과 무수리로 받는 사랑이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살아오면서 사람에게 실망하셨거나 결혼에 실패해 헤어진 분이라면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됨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스멀스멀 밀려오는 죄책감에 영혼이 멍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비밀스럽게 지어지고 비밀스럽게 태어나고 비밀스럽게 양육되어져 비밀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역사는 비밀이 드러나는 것으로 마감을 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대규모의 어린양 혼인 잔치입니다. 그러니 어린양 혼인 잔치를 연습하는 이 땅 결혼식은 얼마나 엄숙한 자리입니까.
오늘 내가 참석한 두 가정은 모두 나의 후배로 자칭 기독교 명문 가정인데다 의사와 사장으로 돈을 많이 벌어 화려한 야외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지만, 자신의 수준을 드러내는 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 아쉽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신혼여행도 못 간 처지에 아직도 재정 여유가 없어 하나밖에 없는 딸 결혼마저 부담 갖고 사는 나로서는 오늘 같은 화려함에 기가 눌리기도 하지만, 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 혼인 잔치만 생각하면 신이 납니다. 그날은 오늘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축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는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결혼식에서 “너희들은 이혼할 수도 있느니라”라고 말할 순 없으나, 그 말씀의 진의만은 분명히 전해 주어야 합니다. “얘들아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헤어질 수도 있다. 그게 인간이다. 인간의 사랑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는 절대 헤어질 수 없다. 너희가 헤어지려 해도 신랑인 그분이 놓아 주질 않는다. 그분의 사랑은 죽음 같은 사랑이다. 완전한 사랑이다. 너희 결혼 생활 내내 그 사랑을 배우고 경험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가서가 복음으로 들려지길 바란다” 이런 말 하는 주례자가 나오길 학수고대합니다. 그런 주례라면 아무리 바빠도 축복하러 달려갈 것 같습니다.

 

월간 낮은울타리 2020 9월호 편집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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