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편지

아가서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작성자
Peter
작성일
2017-08-31 00:00
조회
1564

아가서 공부 준비하느라고 열흘을 꼬박 썼습니다.

부산부터 시작해서 여러 곳의 비비에스로 모이는 지체들과 공부할 내용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최금남 목사님에게 아가서 배웠을 때 가졌던 감동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아가서의 히브리어 제목은 노래들 중의 노래, 우아한 노래,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저자는 솔로몬이지요.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집입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가정사역 프로그램 하면서 부부문제 해결 위한 책으로 이 아가서를 선택했다고 하네요. 아가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무지한 교회 뿐 아니라 이단이나 밀교密敎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읽히는 책이 계시록과 더불어 이 아가서라고 한다는 군요. 하나는 아가서를 부부관계 실용서로 착각하고 하나는 성적 쾌락을 경험하기 위해 은밀한 도구로 사용하고... 물론 신랑인 솔로몬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거나 신랑이 떠났을 때 신부가 어떻게 처신하는가에 대한 내용 때문이기도 하고 표현 자체가 성적 상상을 일으키는 용어들이 섞여 있어서 그런 오해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아가서를 음담패설의 수준이나 남녀 간 애정문제 해결책의 교과서 수준으로 본다는 건 정말 넌센스입니다. 아가서는 다른 모든 성경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적어놓은 책이기 때문에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지 않으면 그렇고 그런 애정소설로 전락하고 맙니다.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의 지혜나 얻어내라고 주신 책으로 오해하는 지도자들 때문에 꼴다운 꼴을 먹어야 하는 양들이 생명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가서의 솔로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아가서와 뜻이 같은 평화란 이름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아가서 전체가 창세 전 언약은 물론 그리스도와의 연합, 구속의 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가서 6장 13절을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 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는냐” 하는 구절이 나오지요.

이렇게 말하는 이는 신랑(솔로몬)입니다. 듣는 대상은 예루살렘 여자들입니다. 일단 아가서 읽을 때는 화자話者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하고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개역개정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새번역 성경에는 화자가 누구인지 적어놓았습니다. 물론 구절에 따라 화자에 대한 견해가 약간 다를 수 있으니 참고하셔야 합니다.

어쨌든 앞의 구절을 풀어보면 “너희가 술람미에게서 보려는 건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과 같은 것이지?”입니다. 이것은 신랑인 솔로몬이 신부인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을 은근히 자랑한 것입니다. 마하나임이란 ‘천사의 두 무리’란 뜻이지요(창 32:1-2), 무리는 춤이란 뜻이니까 마하나임은 천사의 춤으로 풀어지는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이같이 천사들의 춤처럼 아름답고 고상한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여자들을 향하여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한 것은 “술람미 여자를 통해 놀라운 간증 듣기를 원하느냐?” 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술람미처럼 시련과 연단을 통하여 성장한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귀한 보배라는 걸 인정하시는 부분입니다.

마하나임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창세기에서였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죽도록 고생하다가 언약에 의해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에 마하나임이란 지명이 등장하지요.

야곱이 훔친 장자권은 그 언약의 땅에서만 유효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야곱에게 반드시 내가 이 땅으로 너를 돌아오게 하겠다 그러셨고, 벧엘에서는 내가 너를 단 한시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약속하신 하나님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죽도록 고생만 하도록 놔두신 이유는 뭘까요. 나중엔 야곱의 환도뼈를 쳐 불구가 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때로 우리는 변화되기 전 야곱처럼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인식할 수 없어 절망감이나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야곱 뿐 아니라 요셉이나 모세 등의 생애에서 역사 속 한 단면만 본다면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섭리가 있었습니다. 섭리란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술람미 여자와 마찬가지로 야곱이 그 섭리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역동적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언약은 성취되고 가나안에 입성하려는 야곱 앞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은 야곱을 호위하러 온 천사들이었습니다.

창세기 32장 2절에 보면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님이라 하였더라”

보세요. 마하나님이란 이름이 나오지요?

마하나임은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마하나임은 피난처라는 의미와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보호 받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늘 성전의 상징으로 보기도 하고 하나님 백성을 보호하는 군대, 산성, 바위라 하기도 한다.

그럼 “마하나임에서 신부가 춤을 춘다”, 라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술람미가 생각하기를, ‘이 신랑은 나를 절대로 사랑하고 있으며 신부인 나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그러니 저절로 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과 연합이 되어서 아름답고도 신령한 자태로 춤추고 있는 모습은 묵시 속에서 언약이 완료됐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되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언약과 맥락으로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언약의 성취는 야곱 뿐 아니라 다윗이나 요셉의 경우를 보면 더 확실해 지지요.

하나님이 아가서를 통해 말씀하시려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언약의 상징인 베데르 산에서 뿐 아니라(아 2:7) 약속의 땅 마하나임에서 춤을 추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천사의 춤이고 생명의 춤 추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누구처럼 모태신앙인이면서도 아직까지 부정적 성격을 고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나 기회만 오면 자기 가치를 챙겨 가지려는 자들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춤입니다.

그렇게 춤을 추는 성도에게 이 세상이나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돌아와. 돌아와서 우리 함께 계명과 율례를 지키며 살아야지” 라고 합창을 합니다.

신부는 이미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율법주의를 따르는 예루살렘 여자들이 “돌아와서 우리를 만족시켜 줘.”

그 때 하늘에서 울리는 소리

“얘들아, 지금 그녀는 마하나임의 춤을 추고 있어. 그런데 너희들이 감히 그 모습을 보려고? 아니야 너희들은 못 봐. 왜냐면 너희들은 자충성과 항상성의 대가들이거든. 너희 자아가 죽기 전에는 절대 볼 수 없을 거야.”

성경공부에 흥미가 없는 분들에게는 대단히 죄송한 얘기지만 나는 지난 열흘 동안 아가서 공부를 준비하느라고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론 최금남 목사님을 비롯해 몇 분의 저작을 짜깁기한 수준이지만 아가서에 빠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은 황홀함 그 자체였습니다. 밥도 먹기 싫었고 잠도 자기 싫었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역에 들어가서 어깨 너머로라도 언약의 세계를 엿본다는 것은 이 세상 어떤 경험보다 감동적입니다. 천국은 이렇게, 애쓰고 힘쓰지 않아도 주님 은혜 안에서 마하나임의 춤을 추게 되는 것이겠죠. 어서 이것을 사랑하는 지체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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