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편지

숙제-이 글을 기독교적 사고로 분석, 통찰해 보십시오

작성자
Peter
작성일
2014-12-08 10:05
조회
387

다음은 제가 매일 신청해 읽는 국내 유명 일간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피터의 편지에 들어오는 분이라면 이런 정도의 글을 기독교적 사고로 분석, 통찰할 수 있으실 것 같아

숙제 하나를 드립니다.

요즘 저에게 주어진 과제가 통찰과 분별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통찰력과 분별력은 생명력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용어 자체가 자칫 추상적이 되기 쉬운 게

문제라면 문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 사고는 외국에 유학 갔다 온 사람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유명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다음 세대를 양육해야 하는 부모나 교사로서는 이 어지러운 세상에 올바른 통찰력 갖기가 쉽지 않고

그것을 전달하기란 더 어려워 보입니다.

생명과 통찰과 분별

생명력은 사역을 통해 얻지만 통찰과 분별은 교육을 통해 활성화되어진다고 믿는 저는 이런 노력이

의미 없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 글을 분석, 통찰하고 자녀와도 나누어 보십시오.

저와도 언제 식사라도 하면서 만나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제목- 황벽 선사는 왜 사미를 때렸을까

                                                                    

 # 풍경1: 저녁식사 자리였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목사님은

"나는 불교를 존중한다. 한때는 불교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불교는 결국 공'空'을 이야기하지 않나.

마지막에는 공만 남는 거다. 어쩐지 허탈하다"고 말하더군요.

일부러 불교를 폄훼하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의 솔직한 생각이었습니다.

불교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교인은 꽤 많습니다.

 

# 풍경2: 젊은 사미(사미계를 받고 아직 비구가 되지 않은 승려)가 불상을 향해 절을 하는 황벽 선사에게

도발적으로 물었습니다.

"부처를 구할 필요도 없고, 법을 구할 필요도 없고, 중생을 구할 필요도 없는데

스님께선 무엇을 구하고자 절을 하십니까?"

사미의 물음에 황벽이 답했습니다.

"부처를 구할 필요도 법을 구할 필요도 중생을 구할 필요도 없지만 일상의 예법이 이와 같은 일이다."

사미가 다시 받아쳤습니다. "굳이 절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그러자 황벽 선사가 손바닥으로 사미를 한 대 갈겼습니다. 깜짝 놀란 사미가 대꾸했습니다.

"너무 거칩니다!"

황벽이 답했습니다. "여기에 무엇이 있다고 거칠다, 부드럽다 하는가!"

황벽이 손바닥으로 한 대 더 갈겼습니다. 사미는 멀리 도망가 버렸습니다.

대체 왜 그랬을까요. 황벽은 왜 사미를 때렸고 "일상의 예법이 이와 같다"고 답한 걸까요. 

 모두가 공이라면 왜 굳이 절을 하는 걸까요. 어차피 물거품이라면 말입니다.

불교의 공은 대체 어떤 공일까요.

 

그리스도교에는 창조의 자리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신의 자리입니다.

거기서 빅뱅이 일어나고 천지가 창조됐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는 예수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신의 자리로 들어오라"는 뜻입니다.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자신의 에고를 못 박으며 그 자리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신의 자리는 에고가 없는 자리니까요.

여기서 물음이 날아갑니다. "에고가 없는 자리는 결국 내가 없는 것 아닌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지 않나. 그럼 불교의 공과 무엇이 다른가."

이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신의 자리가 드러난다. 그래서 그 '신의 자리'가 나를 통해 살게 된다".

사도 바울은 '신의 자리'를 체험한 뒤 실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

그렇게 살면 어찌 될까요.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신의 자리'는 창조의 자리니까요.

그런 '신의 자리'가 나를 통해 사니까 삶이 창조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에도 그런 창조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공입니다.

텅 비어서 허망한 공이 아니라, 텅 비어서 무한대로 창조하는 공입니다.

그럼 황벽 선사는 왜 절을 했을까요. 자신의 눈앞에 불상이 있으니 지혜롭게 흐른 겁니다.

절집의 예법. 그게 황벽의 창조물입니다. 그걸 통해 황벽은 '공의 정체'를 보여줬습니다.

공은 한마디로 '모든 소리를 만들어내는 고요'입니다. 필요한 지혜를 마구마구 만들어내는 공입니다.

그래도 사미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황벽은 한 대 더 때렸습니다. 사미는 반발합니다. 아프니까요.

모든 게 공이라면 아픈 것도 공일 텐데. 굳이 반발할 이유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황벽이 사미에게 몸소 일러줍니다.

 봐라! 너는 공의 자리에서 아프다는 느낌, 거칠다는 생각을 창조하지 않았느냐고.

그게 공의 정체라고 말입니다.

이걸 정확하게 알면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상대의 심장을 꿰뚫는 종교간 소통을 하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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