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편지

내가 너를 폭로시키겠다

작성자
Peter
작성일
2020-06-12 14:18
조회
53

위대한 사도 바울이 사람에게 실망한 적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실화지만 마가에게서 대단한 실망감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바나바와 싸우고 헤어지기까지 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36절에 보면 “며칠 뒤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파한 여러 도시로 찾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런 다음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도 데리고 가려고 하였으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갔다.”

바울 이야기하려고 바나바와 마가를 꺼낸 게 아닙니다. 내 얘기 하려고 저들을 불러낸 것입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고 내 입으로 수십 번 말했으면서 오늘도 사람에 대한 실망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자고 무수히 말했으면서 또다시 사람을 바라보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아마도 기대를 그만큼 더 가졌기 때문이겠지요.
그에게(혹은 그녀에게) 실망한 것은 위선적인 모습, 뻔뻔한 모습, 자기중심적인 모습,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그동안 그에게(혹은 그녀에게) 충성을 하고 애정을 표시하고 특별 대우까지 해줬던 걸 생각하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옵니다.
웃기는 건 그(혹은 그녀) 역시 나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우길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실망은 의외의 순간에 옵니다.
그리고 너무 자주 옵니다.
그러려니 하면서도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하면 밝던 세상이 온통 흐리게만 보입니다.
실망이란 단어는 잃을 실과 바랄 망이 합쳐진 단어지요.
일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거나 기대에 어긋나서 마음이 상한 상태로 누군가에게 기대를 걸지 않았다면 실망도 없을 거란 뜻입니다.
왜 기대를 걸었을까요?
무언가를 바랐기 때문이지요.
내 기대대로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원하는 만큼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요구하는 만큼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니 내가 그(그녀)에게 해 주는 것보다 그(그녀)가 나를 더 기쁘게 해 주리라 믿었는데 기대에 어긋나게 되면서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야 말았습니다.
상실감은 이내 배신감으로 변하더군요.
그럴 수가 있나? 하면서 슬픔과 아픔이 몰려오더군요.

 

실망은 싫증과 다릅니다.
싫증에는 어떤 패턴이 있는데 실망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갑자기 안개가 몰려오듯 감정의 옆구리를 가격합니다.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가슴에 통증이 느껴집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늦은 밤 잠자리에 들기까지 내내 옆구리가 아파 와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에게 실망을 느꼈던 터라 이젠 누구에게도 기대를 걸지 말아야지 했는데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방심하고 말았나 봅니다. 이 땅에서의 길지 않은 인생 동안 실망하지 않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나만큼 사람으로 인해 거절과 배신당하고 실망감 느낀 경우도 별로 없을 겁니다. 몇 가지 사례를 말해 볼까요.

그를 만난 건 지방의 주일 설교 때였습니다.
자기 성도들에게 하는 내 강의에 감동(?)을 받은 그는 낮은울타리 사역에 상당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고, 그걸 계기로 그와 한 팀을 이루어 정성껏 그의 교회를 섬겼지만, 어느 날 갑자기 어이없는 이유로 나를 내쳐 버렸습니다.

또 다른 그를 만난 건 청년 선교 단체에서였습니다.
나는 그를 어려울 때 도왔고 그는 나에게 형제 이상으로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우리는 같이 밥을 먹고 같이 금식하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자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 같이 갈 것을 약속했습니다만, 그 역시 성공한 이후 예전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힘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러 간 나에게 자기 자랑만 늘어놓을 뿐이었습니다.

또 다른 그를 만난 건 그가 목회하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내 강의에 호의를 보였으며 다음 세대 위해 함께 뛰자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외부 사역자에게 자리를 내주는 게 쉽지 않음에도 그는 자기가 서야 할 설교단까지 내주었으며 내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듯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내가 바라는 목회자는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영혼을 낚시질하는 듯한 모습이 나를 더 슬프게 했지요.

그녀를 만난 건 필리핀의 가족 캠프에서였습니다.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며 다가온 그녀를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워낙 살갑게 구는 터라 그만 마음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일마다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가운데 다음 세대 사역의 주요 파트너로 있는 힘껏 도왔습니다. 결과는? 잠을 못 이룰 정도의 통증입니다. 근육이 아프면 직구로 구입한 파스라도 붙일 텐데 마음이 아파 지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낮은울타리 지부 일로 알게 된 또 다른 그녀,
연이은 사역으로 인한 피로 누적으로 숨을 못 쉴 정도인데도 그녀가 사는 곳을 방문해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전달해 주었건만 결정적인 순간 그녀가 돌아서며 남긴 것은 배신감입니다.

그래요. 사람에 대한 실망은 갑자기 옆구리를 가격당하듯이 의외의 순간에 옵니다.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차를 타다가, 역사의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다가 억 하고 통증이 몰려오면 대개가 사람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실망한다는 것은 그 사람 둘레에 걸어 놓은 내 기대의 커튼 뒤 그의 참모습, 가면을 벗겨 낸 얼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니 하면서도 그 가면을 실체로 인정하려 했던 이기심의 결과는 늘 쓰라림입니다. 기대가 없었다면 실망도 없는 법. 문제는 이해득실을 따져 결코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내 욕망이 문제였던 거죠.

실망과 욕망.
배신과 절망.
애착에서 비롯된 상처로 봉변당하는 횟수가 장난 아닌데도 계속되는 이유는 내 안의 욕망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는 욕망은 마음에 허기부터 만들어 냅니다. 그 허기를 아가페 사랑으로 채우지 못하면 후유증에 평생을 시달리게 되는 거지요.
오늘 나를 실망시킨 사람도 알고 보면 나보다 더 허기진 사람입니다.
(그녀)의 허기는 정평이 나 있을 정도입니다. 인정 욕구로 허기진 사람의 특징은 동반의존입니다. 누군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누가 차지할까 봐 얼른 나꿔채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온갖 서비스로 그(그녀)의 마음을 뺏으면 한동안 둘 다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모든 동반 의존자가 그렇듯이 별것 아닌 일로 싸우고 헤어집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다 보면 어떤 패턴 같은 게 만들어지지요. 그(그녀)의 동반의존 망에 걸렸다가 원망과 시비로 버림받은 사람들은 멀리 떠나지도 못한 채 다시 그물망에 걸려듭니다. 나 역시 그중 한사람이었던 겁니다. 거절과 상실, 도피와 폭발, 수동성과 반항성은 흠스에 와서 다림줄 강의를 들은 사람이면 다 아는 내용입니다. 상처는 다른 말로 사랑의 결핍이죠.

 

특히 목회자나 목회자 가족에 대한 실망은 다른 경우보다 실망감이 큽니다.
내가 상처받은 얘기 좀 더 해 볼까요.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 개척 당시부터 화제를 몰고 다니다 어마어마한 교회를 일궈 낸 그로부터 받은 상처는 세월이 가도 씻어지지 않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 직면을 하면 깨끗이 사라지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사춘기 소년의 여드름처럼 불쑥 흉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한때 그는 나의 우상이었고 멘토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가 나에게 한 행동은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쉽게 나를 거절하고 내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할 만큼 다정다감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때 그는 나를 특별 대우해 주었던 사람입니다. 아무도 나의 가능성을 알아보지 못할 때 그는 나를 찾아내, 나는 정말 네가 필요하다 당장 와 주면 좋겠다는 말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로 가는 것은 모험이었지만 그의 명성과 친절을 믿고 삶을 위탁했건만, 결과는 역시나였습니다. 명성에 가려 볼 수 없었던 것을 가까이에서 보는데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주제로 글을 쓰게 만든 그(그녀)가 준 실망감은 하찮을 정도로 어마어마해서 한동안 나는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그의 남편 때문이었습니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처럼 내밀한 사역을 준비하던 중에 만난 부부는 신실해 보였습니다.
실망의 공식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뭔가 기대를 하게 만드는 그(그녀)의 행동은 차츰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결국 이만하면 됐다 싶을 즈음 실망을 주지 않고(?) 실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요 근래 웬만해서는 실망하지 않고 살았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실망입니다.

“고작 세제 따위가 나를 화나게 해? 자존심 상해서 안 되겠다. 얼른 고무장갑을 끼고 세제로 그릇이나 닦아야겠다.” 어느 블로거가 실망에 대해 글을 올렸더군요. “오늘 출근하는 길에 세제를 사 오기로 마음먹고 나갔는데, 아니, 너랑 만나는 줄 알았지. 너의 연락을 받고 기대를 한 내가 바보지. 한 줄로 딱 떨어진 세제를 보니 화가 났다. 너에게 실망했다.” 세상에, 이런 이유로 실망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이 사람도 뭔가 할 말은 많은 것 같은데 실망한 이유가 고작 세제 때문이라니 나는 좀 어이가 없어졌습니다. 사람에 대한 실망을 아이스크림 떨어진 정도로 알다니 얼마나 유치한 글인가요.
어쨌든 그동안 내가 실망한 사람의 이름과 실망한 내용을 다 밝힌다면 놀라실 겁니다. 조금은 내가 왜 이러고 사는지 이해도 갈 겁니다. 하긴 이 세상에 단 한 번도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긴 있죠. 어디에. 무덤에.

실망失望은 어떤 생물이 기대하고 있던 것, 특히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이랍니다. 사전적 정의를 찾다가 잠시 웃은 건 주어를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어떤 생물이라고 적어 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실망은 사람만이 아니라 돼지도 느끼는 감정이고 염소도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실망하셨을까요?
예스.
이사야 5장 1~2절에 보니까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라는 내용이 나오더군요. 얼핏 읽으면 하나님이 실망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어서 실망하셨다는 겁니다.
들포도 맺은 자가 누굽니까? 히브리 사람 이스라엘 아닙니까.
요한복음 15장에 예수님이 ‘아버지는 농부고 나는 포도나무고 너희는 가지니 가지가 좋은 열매 맺히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그랬으니 좋은 포도 맺는 일은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와 요한을 통해 이 글을 쓰게 하신 의도가 “구약 시대 선민들에게도 실망하고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도 실망했다. 그러니 믿을 놈 하나도 없구나!”
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언뜻 들으면 좋은 포도 맺기를 기대한 하나님이 실망하셨다는 내용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게 아닙니다. 핵심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후회하심이라든지 하나님의 뜻이 철회되었다든지, 하나님이 실망하셨다는 표현을 대하게 되면 하나님에게도 오류가 있고 착오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겠지만, 결코 아닙니다. 그게 바로 인본주의자들이 성경을 왜곡하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사야 5장을 대강 읽고는, “아니, 포도원 가꾼 주체가 하나님인데 결과로 나온 것이 들포도라면 책임을 하나님이 지셔야지 어찌하여 인간을 들들 볶는가?” 따지려 든다면 성경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너희는 들포도밖에 생산해 내지 못하는 환자들이다. 그런데 너희는 스스로를 좋은 포도 맺을 자로 착각하고 있구나. 내 그 착각을 때려 없애고 너희 정체를 폭로하겠다.”
폭로라는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해서 이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찔끔하고 놀라게 됩니다.
처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사랑한다니까 자기들 뜻대로 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멋진 집을 준다든지 적군은 소리만 질러도 물러가게 한다든지 사막에 물을 내어 실컷 먹게 한다든지 주변국을 몰수한 다음 노예로 삼아 선민다운 삶을 살게 해줄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를 강퍅하게 하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잘못된 기대를 철저히 부서져 나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바랐던 건 그들이 “우린 하나님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구나. 하나님 안에서 자아가 부서지지 않으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구나!”라는 걸 깨닫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잘나서 사랑을 받을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는 겁니다.

“내가 너를 폭로시키겠다.”
“뭐를요.”
“인간을 의지하려는 그 욕망이 네 안에 가득 차 있음을 폭로시키겠다.”

그랬군요.
여기까지 와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게 되는군요.
매번 그렇지만, 오늘 나를 실망시킨 사람이 실은 나를 폭로하러 보낸 하나님의 사자였음을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 당함이 분해 순간적으로 욱하고 떠들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를 보고 웃으십니다.
“야 임마 아직도 그 수준이냐?”
“하나님도 우리 때문에 실망하셨다고 했잖아요?”
“누가 그래?”
이사야서에 나오던데요.
“야 이놈아, 그건 너희들이 실망하는 그것을 엎기 위해 실망한 것처럼 표현해 놓은 거야”

우띱!

 

peter-eon@hanmail.net

월간 낮은울타리 2020 2월호 편집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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