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마리 금붕어

작성자
신상언
작성일
2019-06-28 10:12
조회
85


 

자기 집이 양어장을 한다며 통통한 여자아이가 금붕어 일곱 마리와 물풀 세 그루를 어항에 담아 가지고 왔다.


 

학년 초라 꽤 삭막했던 교실이 금빛의 붕어들로 해서 조금은 환해지는 것 같았다. 교실 안에 아이들 말고 살아 있는 생명체라곤 화초뿐이었는데 일곱 마리의 금붕어가 더 늘어난 셈이었다. 살아 있어 움직이는 것이 많을수록 그 안에 거하는 우리는 늘 신선함과 생활의 즐거움을 느끼곤 하였다.


 

“모두 힘을 합쳐 정성껏 금붕어를 돌보도록 하자. 우리는 오늘부터 금붕어들의 생명을 책임 맡은 거야. 알겠니?”


 

아이들은 붕어를 닮은 입들을 모아 예라고 모두 외쳤고 당번을 정해 삼일에 한 번씩 물을 갈고 먹이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틀 밤을 지낼 적마다 금붕어는 한 마리, 두 마리씩 죽어 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교실에 들어오면 배를 내밀고 죽어 버린 금붕어가 보기 싫어 애꿎은 당번 아이들만 혼이 났다. 하긴 내가 당번을 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며칠을 두고 관찰과 조사를 거듭한 결과, 금붕어는 물을 자주 갈아 주면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부지런한 사내아이 둘이서 매일 아침 깨끗한 물을 갈아 주었고 양어장 집 여자아이가 채워 놓은 금붕어 일곱 마리는 오랫동안 싱싱하게 살아갈 수가 있었다.


 

어항을 앞의 내 책상으로 옮겨 놓게 한 후 바로 내 눈앞에서 헤엄치는 그 녀석들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다 평화로워진다.


 

작은 연못.


아기 금붕어.


하이얀 구름 타고


하늘 나라 은하수


소풍을 간다


- 정하늘 시인의 시


 

몹시 더운 어느 날 오후였다. 5교시 수업을 마쳐 갈 무렵 한 아이가 느닷없이, “선생님, 금붕어가 죽어 가요!”하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하여튼 모두 깜짝 놀라 어항을 바라보니 정말 금방까지도 멀쩡하던 주황색 붕어 한 마리가 침몰하는 배처럼 옆으로 누워 꼼짝 않는 것이었다. 금붕어의 죽음에 나나 아이들이 그렇게 안타까움을 느꼈던 것은 생명체에 대한 외경심에서였을 것이다. 미물이지만 생명을 잃고 죽어 가는 것을 본다는 일은 얼마나 가슴 아픈가. 나는 얼른 두 명의 당번을 불러 새로운 물을 넣어 주게 했다. 그때서야 수돗물 냄새가 너무 나서 아침녘에 물을 갈아주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따로 떠서 놓아두었던 물을 붓고 지켜 보기를 얼마, 참으로 신기하게도 침몰해 가던 배는 서서히 숨을 헐떡 거리며 떠오르는 것이었다.


 

“와, 신난다. 살아난다. 살아나!


 

어항에 코를 박고 있던 사내 녀석이 손바닥을 치며 좋아했다. 십 분쯤 지나자 금붕어는 완전히 정상을 되찾았다. 소생한 것이다. 마치 사르밧 성 여인의 외아들처럼, 나사로처럼, 나인성 과부의 아들처럼 죽음에서 건지움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모습이었다.


 

그 경이로움, 죽음의 껍질을 벗고 다시 태어나는 것. 더러운 물과 같은 죄악의 굴레에서 성령의 새로운 물을 마시며 태어나는 내 자신의 모습이었다. 숨을 할딱거리며 죽음의 공포에 몸을 떨기도 하며, 그러나 곧 모든 삶의 기쁨을 누리며 더 나아가서는 영원에로의 소망까지를 갖게 되는 이 놀라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한복음 11장 25~26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한복음 7장 38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도서 3장 11절


 

이 글은 아주 오래전 교직에 있을 때 쓴 것입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던 시절인데 저 이야기의 주인공 중 한 명을 이번 LA 방문 때 만난 것입니다.


 

오렌지 카운티의 한인 교회 행정 목사로 시무하는 김기봉 목사는 그날 심방을 하러 차에 올라타 아무 생각 없이 라디오 스위치를 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오래전 학교 은사의 목소리가 차내에 울려 퍼져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인천을 떠난 지 열 시간여 만에 LA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점심을 먹고 숙소에서 한 시간 반가량 눈을 붙인 뒤 비몽사몽간에 복음방송 스튜디오로 가 생방과 녹음을 했는데 김 목사는 다음 날 그 녹음 방송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 시각 나는 로뎀 장로교회에서의 세미나를 마치고 같이 간 일행과 세미나 장소를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십 분만 서둘렀어도 김 목사를 만나지 못했을 텐데 일행 중 누군가 현수막을 뗀다고 기다려 달라는 바람에 조금 지체했던 게 운명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차의 엔진을 켜고 교회 마당을 떠나려는 순간 로뎀교회 직원이 헐레벌떡 뛰어와 누군가 꼭 연락을 바란다며 전화번호를 전해 주었고 그곳에 적힌 이름이 김기봉이라는 것을 보는 순간 몸에 전율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기봉은 반에서 키가 작은 편에 속했는데 어찌나 성실했던지 금붕어를 일 년 동안 죽이지 않고 잘 관리해 냈습니다. 아는 사람 은 아실 테지만 작은 금붕어 일곱 마리를 작은 어항에 넣어 일 년이나 죽이지 않고 살려 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 학교는 왕십리 중앙시장 근처에 있어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아이들이 많았는데 내가 줄 수 있는 건 차별 없는 교육과 생명의 복음이라 생각되어 사영리로 시작, 학과 공부 이외 시간에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얘들아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너희가 복음이 무엇인지 알기를 바래. 사영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시며 너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단다.”


 

내 반에 구원받아야 할 생명이 있다면 내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침 한 시간 일찍 나와 복음을 전했는데 금붕어 담당 기봉이 내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목사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학교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누군가 우리 가족은 절에 다니는데 담임이 일방적으로 교회에 나가라고 강요한다며 교장에게 항의 전화를 해 당장 교실에서 복음 전하는 걸 금지당했고 주일 오후에 나올 사람만 나오라고 해 운동장에서 모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기봉이 몇 안되는 운동장 교회 학교 출석 아동이 된 것입니다.


 

“와, 신난다. 살아난다. 살아나!”


 

기봉이 어항에 코를 박고 소리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세월은 흘렀지만, 생명은 그대로입니다. 교직에 있는 동안 나는 우리나라의 두 양극단을 오가야 했는데 기봉은 그중 가난한 학교 학생에 속했습니다. 물론 더 가난한 학생도 있었지만 두 번의 사립학교에 비하면 왕십리 중앙시장은 결코 잘 사는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천 구백칠십 년대 왕십리는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습니다. 부모들이 주로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들이었습니다. 학교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마치 화장터같이 음침했습니다. 그곳에서 한 달에 두세 번씩 숙직을 하노라면 삐걱거리는 소리 때문에 가위에 눌리기도 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몇 번의 중요한 만남을 하게 되는데 어린 기봉과의 만남은 운명을 바꿔 놓을 정도의 만남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생 때 CCC에서 배운 사영리를 알려 주긴 했어도 기봉이 그걸 계기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뒤 그 생명을 전하는 목사가 되리라고는 그 당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가난한 아이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에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사영리를 전하고 나 자유 얻었네, 내게 강 같은 평화 등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 엉성한 활동을 통해 기봉에게 복음이 흘러들어간 것입니다.


 

내가 감사해 하는 것은 기봉 같은 사례가 더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캐나다 밴쿠버에서 강의를 마치고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키가 훤칠한 청년이 다가오더니 “저를 몰라보십니까?” “모르겠는데요.” “십 년 전 여의도 순복음 중등부 강의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요.” “오산리 기도원에서 선생님 강의를 듣고 인생이 바뀐 사람입니다.” “그때 사천 삼백 명 이나 있었는데.” “맞습니다. 그중 한 사람입니다.”


 

다음 날 연어 올라오는 곳에 여행 가자며 나를 데리고 나섰는데 운전대 잡은 손이며 식당에서 나이프 잡은 손이 떨리는 걸 보고 “어디 아파요? 수전증 같은데” “아닙니다. 내 인생을 바꿔 놓은 분 앞에 있으려니 너무 감격해서 그런 겁니다. 다시 인사드리지만, 그때 오산리까지 오셔서 열정적으로 강의해 주신 것 너무 감사합니다.”


 

때로 내가 걷는 이 길이 너무 힘들고 외로울 때면 내게 면류관 씌워 준 그들을 떠올립니다. 오산리에서 무주 구천동 야외 운동장에서 경상북도의 무슨 수련원이라든가 전남 목포와 군산 등지에서 내 강의를 듣고 복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 후 인생 항로가 바뀌었다는 고백을 들으면 힘없던 다리에 생기가 나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무주 구천동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부산 어디에선가 일차 강의를 끝내고 아내가 운전하는 프라이드에 몸을 실어 백 아홉 고개 굽이굽이 돌아 무주에 도착한 뒤 개 쓰러지듯 숙소에서 잠을 자고 오전 강의를 하러 야외로 나왔을 때 만 명 가까운 청소년들이 햇살 가득한 운동장에 주욱 앉아 나를 기다리던 모습.


 

요즘 같으면 난리가 났을 테지만 그때만 해도 아이들은 순진하고 교사들은 열정에 넘쳐 있어 고신 에스에프씨 대회에 몰려든 학생들에게 마이크에 대고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면 아멘 하고 온 세상에 울려 퍼지던 함성.


 

그 만 명 가운데 앉아 있던 학생 중 하나가 바로 이번 김기봉 목사를 같이 만난 조희창 군(?)이었습니다. 조희창 군 역시 목사가 되어 낮은울타리 미주 본부를 맡고 있는 중이니 어찌 감격이 몰려오지 않겠습니까?


 

이번 LA 방문 목적은 한 가지.


 

LA에 낮은울타리 지부를 세워 이민 교회 자녀 양육을 효과적으로 돕자는 것이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기도해 오던 일이었기에 주님이 어떻게 인도하실지 궁금해하던 차에 뜻하지 않은 김기봉 목사를 만나고 마지막 날 극적으로 LA 지부까지 세워지게 되었으니 오랜 비행기 여행 의 피로와 극심한 시차가 아무리 힘들게 해도 밀려오는 감동을 억제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 정성껏 금붕어를 돌보도록 하자. 우리는 오늘부터 금붕어들의 생명을 책임 맡은 거야. 알겠니?”


 

양어장 하는 여자아이가 비닐봉지에 금붕어를 담아 가져오지 않았다면 기봉이의 성실함도 몰랐을 것입니다. 기봉이 금붕어를 열심히 키우지 않았다면 이삼일 내로 죽어 버리는 물고기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을 테고 그로 인한 어떤 추억도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봉이가 잘 키운 금붕어 덕분에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죽었다 살아나는 유사 부활의 현장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기봉이 덕분에 일곱 마리 금붕어라는 제목의 글을 쓰게 되었고 요한복음 11장 25절과 전도서 3장 11절을 외우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나이 들어 여기저기 다니는 일에 힘이 들고 사람과 재정의 어려움은 물론, 내가 사랑해야 할 한국 교회는 여전히 무심한 눈길만 보내거나 아프리카 사하라보다 더 삭막해져 계속 이 사역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터에 나를 통해 복음을 흘려보내신 주님의 섭리를 이 먼 LA까지 와서 깊이 경험하게 되니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더란 얘기입니다.


 

- 월간 낮은울타리 2019년 2월호 편집인의 글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