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조금 과속을 하면...

작성자
신상언
작성일
2019-05-16 18:33
조회
16

부산 리더 모임도 취소하고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아이 두 명 포함 열한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담임 목사는 미안해 어쩔 줄을 모르는데 개척교회라 충분히 이해한다며 예정대로 강의 중심의 첫날 집회를 마쳤습니다. 사실 숫자보다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에 두 시간 강의하기가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다른 곳에서보다 더 열심히 자녀 양육에 대한 강의를 해 주고 났을 때 시계가 밤 아홉 시 반을 훌쩍 넘기고 있었습니다.


안산에 있는 모 교회에서 분리 개척한 지 삼 년 하고도 십 개월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교회 식구가 많아지면 그때 나를 초청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미룰 수가 없어 이번 집회를 계획하게 된 거라고 젊은 담임 목사는 근처 식당에서 강사 대접을 하며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개척 후 순탄하게 왔으면 지금쯤 성도가 오십 명쯤 되었을 텐데 얼마 전에 열 가정이 약속이나 한 듯 먼 곳으로 이사를 떠나 교회가 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큰 교회 부목으로 있을 때는 성도 한 사람 귀한 줄 잘 몰랐는데 개척을 하고 보니 한 가정은 물론 한 사람의 자리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겠다며 그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집에서 해결하거나 근처 식당에서 밥 먹고 집회 장소로 가는데 오늘은 일찍 와서 담임 목사와 함께 식사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서별 초청 강의가 아니라 명색이 교회 부흥회라면 교회 상황을 알아야겠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습니다.


요즘은 큰 교회도 사람이 안 모이는데 핵심 멤버들이 멀리 이사를 가 성장 동력을 놓쳐 버린 개척교회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너무 식어버린 분위기가 아쉬웠습니다. 개척교회일수록 뜨거워야 전도도 하고 사역도 해나갈 텐데 오늘 내가 느낀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동차 산업에 의존도가 높은 게 문제에요. 요즘 우리나라 형편이 말이 아니잖아요. 그중에 자동차가 직격탄을 맞아 지역 경제가 휘청거린 거지요. 다들 사업이 어려워져 고향으로 돌아간 거니까 이해는 하면서도 너무 아쉬워요. 한 가정은 속초로, 한 가정은 대전으로, 한 가정은… 순식간에 함께 일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어요.”


두 번이나 개척교회를 섬겨본 우리 부부로서는 개척의 어려움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 심정 이해한다며 뜨거운 만둣국을 국자로 떠서 젊은 담임 목사 그릇에 넘치도록 부어 주었습니다. 오래전에 서울 강남역 근처에서 존경하던 선교회 간사님과 교회를 개척하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성경 공부를 잘 인도하기로 소문이 나서 교회를 개척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올 줄 알았는데 무려 이 년이 지나도록 한 가정도 오지 않아 간사님 부부와 우리 부부만 앉아 힘들게 예배드리던 그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예배 도중 문 여는 소리가 들리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고 설교 말씀보다는 밖에서 나는 인기척에 더 관심이 가던 그때, 힘없는 노인이라도 한 사람 들어와 주기를 바라고 지나가는 여행객이라도 찾아 와 예배를 드려 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던 그때.


누군가 아파서 예배에 빠지거나 사정이 생겨 교회를 떠나는 이가 있으면 그렇게 눈물이 나던 그때.


“좀 더 있다 모시려 했는데…”


그 말을 여러 번째 하는 건 교인 숫자가 적어 미안하다는 뜻입니다.


“괜찮아요. 누군가 저를 통해 강의를 들어야 하기에 저를 불러주신 거겠죠. 이게 내 소명이니 괜찮아요.”


그랬습니다. 쉴 새 없는 사역에 피곤이 누적되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소명과 사명이 그것을 이겨내게 하는구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허리가 너무 아파 얼마의 시간이라도 누워있다 오고 싶었지만 집회 첫날은 담임 목사와 식사를 하는 게 예의다 싶어 치과에 갔다 바로 왔는데 잘했다 싶었습니다. 이게 다 부르심의 흔적이겠지요.


부르심.


내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의 부르심…


열 명이 모이든 백 명이 모이든 가서 전하라고 부르시던 부르심…


지금 내 직업은 다음 세대 사역자고 직업의 형태는 떠돌이입니다. 부산으로 양재로 강북으로 인천으로 시드니며 엘에이로… 학교 교사라는 직업을 갖고 살다 문화 사역 한다고 교장에게 쫓겨(?)나와 떠돌이 사역자가 된 지 벌써 삼십 년이 지났네요. 그동안 함께 일하던 간사에게 배신도 당하고 재정 파탄 이라는 어마어마한 일도 겪었네요. 다행히 나는 시간이 갈수록 다음 세대 사 역자라는 부르심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삼십 년이나 한길로만 달려와 지금쯤이면 지칠 만도 하겠지만 이상하게 요즘 주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은 점점 커져 가,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감사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아, 소명이 이런 것이구나.


그래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구원 영역만이 아니라는 걸 아는 나로서 오늘 같은 상황에 어떻게 흔들릴 수 있겠어요. 나를 초청한 담임 목사는 생각보다 참가자가 적어 안절부절못하시지만 나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리라 결심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거듭 말해 주었습니다. 지금의 내 직업은 사람을 향한 것이지만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선교사도 엄연한 직업이지요.
직업이란 한자는 맡을 직職에 일 업業자로 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풀어쓰면 일을 맡는다. 라는 뜻이지요. 직업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고 세상 사람과 어울려 사는 방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일’입니다.


직업은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JOB이 있고 소명적인 의미로서의 VO-CATION이 있습니다. 우리는 VOCATION을 천직天職이라고 부르지요. VOCATION은 ‘부르다’라는 라틴어 VOCARE에서 왔습니다. 그 안에 담긴 뜻은 ‘주님이 그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가 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직업관은 ‘나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계획 가운데 하나님 나라 완성을 위한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업의 의미를 배우려는 올바른 자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고 그것에 순종하려는 마음에서 비 롯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올바른 직업관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못해도 일 년에 한 번은 직업 캠프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번 캠프는 1월 2일부터 부산 지부 중심으로 개최하려고 하는데 일 년 중 가장 추울 때지만 이번 캠프에 참가하는 아이들과 부모 모두 천직에 대한 분명한 의미와 소명과 사명에 눈을 뜨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천직을 찾지 못하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방황하게 될 지 너무 잘 아는 나로서는 이번 직업 캠프에 정성을 쏟으려고 합니다.


구원 영역만이 아니라 사역(직업) 영역이라는, 삶 전체를 향한 부르심… 요셉의 경우는 목동에서 노예로, 노예에서 노동자로, 노동자에서 총무로, 총무에서 죄수를 거쳐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죠. 부분적인 의미로 보면 요셉처럼 직업의 종류나 역할이 바뀔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주님의 부 르심은 고급이나 저급 없이 모두가 똑같은 것이라고 칼빈은 해석해 주었습니다.


칼빈은 직업이 곧 사명이 될 수 있다고 정의했지요.


선교사나 목사만 사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짓는 일이나 정치하는 것이나 상업 활동, 언론에 관계된 일, 저술 활동, 사업가나 교육자로 사는 것도 사명 역역에 들어간다고 봤습니다.


직업 현장에서 보수나 이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순 없지만 일하는 목적이 오직 보수나 이윤이라면 사명을 좇아 일하는 게 아니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칼빈의 주장대로라면 농부의 경우, 속임수 없이 농사를 지어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한다면 사명자라 할 수 있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 유통을 원활하게 하여 믿을 수 있는 상품을 적정한 가격으로 공급하는 일도 사명에 해당하며 과다한 청구 없이 환자 돌보는 의료인,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주부 역시 사명자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진짜 사명자는 하나님 나라 완성 개념을 가진 경우 아닐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우리에게 임한 은혜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영광의 나라입니다.


은혜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공생애에 들어가시면서 선포하신,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면 이루어지는 바로 그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개념은 현재가 되기도 하고 미래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현재적 영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셨고 동시에 당신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미래 영역으로도 소개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 되어 그가 부르신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전보다 강하게 미치게 된 현재성과, 종말론적으로 그의 구원 역사를 온전히 성취함으로써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미래성을 동시에 내포하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미 구원받은 현재와 아직 오지 않은, 온전히 완성될 구원을 바라보는 미래 사이의 긴장 속에서 성령의 힘을 의지하여 성도의 견인堅忍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모든 영역을 가리키는데 사실 이 개념은 세례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소개되었습니다.


어느 설교자의 표현을 빌리면 “세례 요한은 이 새로운 개념의 나라 문턱에 겨우 서 있었을 뿐이지만, 이후 소명과 사명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아무리 작은 자라 하더라도 세례 요한보다 엄청난 능력으로 이 나라를 완성해 나가는 동시에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래요. 하나님 나라와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얼마나 우스워질까요?


아이 포함 겨우 열한 명을 위한 부흥회 위해 한 달 이상이나 강의 준비를 했다면 믿으실 건가요?


어떤 이는 내가 별 준비도 없이 앞에 나가 술술 이야기한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비록 같은 내용이라도 강의하러 가기 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시 훑어보면서 “하나님 이번 강의를 통해 누군가의 삶이 바뀌게 해 주세요. 건강한 부모가 되거나 능력 있는 양육자가 되게 해 주세요”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더구나 이번처럼 부흥회 이름이 붙은 곳에 갈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한 달 이상을 열심히 준비하고 그 중요한 부산 리더 훈련까지 취소하고 갔는데 달랑 아이 포함 열한 명이 앉아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직업관은
‘나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계획 가운데
하나님 나라 완성을 위한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업의 의미를 배우려는 올바른 자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고 그것에 순종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결코 작지 않은 예배당에 여기저기 드문드문 앉아있는 사람들은 웃지도 않습니다. 별 기대감 없이, 오직 담임 목사에 대한 부담감으로 나와 있다는 게 확 느껴지면 강사로서 다리에 기운이 빠지지만 나는 부르심, 즉 소명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며 없는 다리에 힘을 줍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부르심 이 아니라 부르신 이를 생각합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래전에 이 일로 부르신 이의 부르심을 생각하면 환경에 따라 흔들리던 감정이 가라앉는 걸 경험합니다. 무려 삼십 년 동안 쉼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소명과 천직의 핵심 요소인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의미는 ‘그 나라 백성’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구속된 사람들’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서부터’ 주신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뿐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왕이신 다스림에 참여하는 복된 존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다스림 그 자체라고 한다면 그 다스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지금 받고 있다고 믿는 사람만 이 장차 임할 영원하고 복된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의 다스림이 단순히 이상적인 내용이거나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사탄의 나라와 악의 세력을 파하는 강력한 힘이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전해주신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으로부터 능력 곧 5 JESUS POWER를 충만히 받아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이 땅에서 확장 해 가는, 놀라울 정도의 역동성인 것입니다.


“교인 숫자가 많아진 다음 선교사님을 초청하려고 했는데 어제 이송용 선 교사님의 강의를 듣다가 깨달았죠. 이번 부흥회는 이 선교사님과 신 선교사 님을 통해 목회 방향을 잡으라는 주님 뜻이 있다는 것을…”


“그랬군요.”


“성도들이 담임 목사의 말만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어요. 무엇을 믿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한데 그것을 위해서는 각 계의 전문가 말을 들어야 한다고...”


“네에…”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두 분 전문가를 모셨는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이 너무 적게 와서 몹시 죄송하긴 하지만…”


모 교회의 권사가 운영하신다는 식당이었는데 만두가 얼마나 맛있는지 추웠던 몸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따뜻하고 맛있는 국물에 기분이 좋아져,


“우리 부부도 두 번이나 개척교회를 섬겨 봐서 잘 알아요. 앞으로 더 힘이 들겠지만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어요.”


집회를 마치고 집에 오는데 차 안에서 아내가 계속 울먹거리며,


“얼마나 힘이 들까.”


“힘들 거야.”


“우리가 경험해 봐서 알잖아요.”


“쉽지 않겠지.”


“내일 여기 안 따라 올려고 했는데 와야겠어요. 한 자리라도 채워야지요.”


아내도 열한 명이 눈에 밟혔나 봅니다.


“신학 전공했다는 사모도 참석 인원이 적어 거듭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어찌나 안쓰럽던지,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재정은 어떻게 채워 나갈지… 그래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름답네요.”


그래요.


열심히 일한다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건 그들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 아닙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러하듯이.


그분은 창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 창조 이후에도 끊임없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구원의 역사를 친히 이끌어가는 분이시지요.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최초의 노동 명령은 어때요. 어떤 사람은 노동을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동은 인간의 타락 이전에 주어진 것이며 다만, 타락 이후에는 고통이 더해진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그랬죠.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자세히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칭찬받은 건 많이 남겨서가 결코 아니었어요.


그들은 많이 남기려면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말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신뢰와 믿음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지요. 이해, 인식, 의존을 거쳐야 선물로 주어지는 겁니다. 달란트 비유 가운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열심히 일했는데도 그것밖에 못 벌었으면 그것만 갖고 살아라. 라는 주님 음성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과한 욕심은 욕망으로 변질될 거라는 말씀이지요. 나 역시 한때는 많이 남기려는 유혹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욕심 때문에 자신을 망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 합니다.


오늘 허리가 아픈 건 늙어서 그런 것이지 과도하게 일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늙으면 일을 줄여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교회는 더 자주 와서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개척교회라 내일은 만둣국도 안 얻어먹으려 합니다. 그냥 집에서 누룽지에 물 말아 먹든지 교회 근처에서 간단한 것으로 요기를 하고 집회에 들어가려 합니다.


칼빈은 직업이 곧 사명이 될 수 있다고 정의했습니다.


그 말은, 직업을 통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사명은 없다는 말이 되겠지요.


나의 직업은 사역자입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사람을 양육하고 세우는 사역자입니다. 고상한 언어로는 선교사입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부름 받은 선교사입니다. 때로는 열심히 준비하고 갔는데 아이 포함 열한 명 밖에 오지 않아 힘이 빠지기도 하지만, 아프리카 오지奧地 보다는 낫지 않냐 하면 서 그 열한 명에게 정성껏 준비한 강의를 하고 돌아와야 하는 선교사입니다.


나중에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눈물 뿌린 씨가 거목으로 자라길 기도하면서, 하나님! 이 교회에 준비된 영혼을 속히 많이 보내셔서 남아있는 성도뿐 아니라 젊은 목사 부부가 힘이 나게 해 주세요.


잘 가라는 담임 목사의 인사를 뒤로 한 채 차에 올라 시동을 켜고 운전대를 잡자 아까보다 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아프다는 말을 삼킨 채 얼른 가서 쉬고 싶다고, 사람이 적어 안타까워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다행히 조금 과속을 하면 집에까지 삼십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내비게이션에 나와 있네요!”


- 월간 낮은울타리 2019년 1월호 편집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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