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모스트, 그리고 구속사에 대하여

작성자
신상언
작성일
2018-11-26 10:49
조회
694


 

자율주행차 아시지요?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스스로 운전해 가는 자율주행차가 곧 실전에 배치될 거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얼마 동안 기분이 이상할 것 같습니다. 자가용을 샀는데 운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목적지만 말하면 저절로 굴러가는 차 안에서 잠도 잘 수 있고 신문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하겠어요. 장애를 가진 사람은 물론, 나이 많아 면허 유지가 어려운 노인들도 살만한 세상이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싱귤래리티singularity라는 특이점을 넘어 인공지능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한 입력된 프로그램으로 움직이는 자율주행차가 갑자기 뛰어든 자전거 때문에 급하게 핸들을 돌려야 할 때, 오른쪽으로 돌리면 다가오는 트럭에 치여 차 주인이 죽고 왼쪽으로 돌리면 무리 지어 가는 여러 명의 보행자를 치려 하는 상황이 온다고 했을 때 과연 어느 쪽으로 핸들 꺾도록 프로그래밍할 거냐? 이 질문을 던지자 질문을 받은 사람 모두는 당연히 차주인 한 사람이 죽는 거로 해야 한다고 응답했답니다. 당연하죠. 그런데 이번에는 질문자가 “그럼 주인이 죽도록 프로그래밍 된 차를 돈 주고 살 거냐?”라는 질문을 던지자 응답자 모두 싫다거나 모르겠다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히긴 하지만 이걸 트롤리의 딜레마라고 한다네요.

모스트라는 체코의 단편 영화 이야기를 해 볼까요? 모스트는 체코어로 ‘다리’라는 뜻입니다. 2004년 제76회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영화 작품상 부문에 후보로 올랐던 작품이지요. 이 영화에 나오는 다리는 배와 기차가 함께 지나다니기 위한 개폐식 다리로 부산 영도 다리와 비슷한 구조입니다.

영화는 그 다리를 관리하며 기차의 운행을 돕는 한 아버지와 어린 아들에 관한 이야기로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 서로의 옷깃을 여며 주며 아버지의 일터로 어린 아들이 따라나서는 장면으로 시작이 됩니다. 아들은 아버지 일터에 같이 가는 게 소원이었는데 오랜만에 아버지가 데려간다고 하자 한껏 들뜬 얼굴입니다. 여느 때처럼 매일 출근하는 언덕 위 기계 관리실로 들어간 아버지는 멀리 강 아래에서 낚싯대를 던지며 노는 아들을 한 번씩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굴 표정만 봐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아들아 조금만 기다리면 임무 교대를 한 후 같이 낚시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져 주마. 잠시만 혼자 놀고 있어 다오. 행복하기만 한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가고 기계실 전화가 울리며 다리 밑으로 배가 지나가게 해 달라는 사인이 들어오자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레버를 조작해 다리를 들어 올린 다음 배가 지나갈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뭐가 잘못되었는지 다리가 올려진 상태인데 멀리서 빠른 속도로 기차가 달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의 실수라면 기차 운행 시간을 잊은 것이고 기관사의 실수라면 운행 시간을 소년의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튼, 기계 관리실 안에 있는 아버지가 달려오는 기차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둔덕 아래에서 낚시를 하던 아들이 직감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을 눈치챕니다. 아들이 눈을 들어보니 저 멀리서 기차가 하얀 연기와 함께 기적을 울리며 다가오고 있고 아버지 쪽을 보니 아버지는 의자에 앉은 채 서류 같은 것만 살피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와 기차 오는 방향이 기역자로 꺾여있어 아버지 눈에는 기차가 안 보이지만 아들은 양쪽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대번에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놀라 “아빠, 기차가 들어와요. 얼른 다리를 내려주세요” 외치지만 아버지는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낚싯대를 내던지고 아버지에게 뛰어갈까 하다가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아버지와 반대쪽으로 뛰어 수동으로 레버를 조작하는 다리 밑으로 기어들어 갑니다. 전에 아버지가 그렇게 해서 다리를 올리고 내리는 걸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는 걸 관객만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기계 관리실에 있고 아들 혼자 다리 밑으로 기어가 레버를 당기는 장면이 교차 편집되어 그것을 보는 관객은 손에 땀을 쥐게 됩니다. 기계 관리실에 앉은 아버지의 뒷모습, 조그만 몸으로 다리 밑의 수동 레버를 손으로 당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소년, 기차에 타서 웃기도 하고 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승객들의 모습, 하얗게 뿜어 나오는 연기,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기차의 육중한 바퀴 소리, 그리고 다시 온 힘을 다해 레버를 움직이려는 소년의 얼굴.

“힘내라 소년아”

응원해 보지만 강철로 된 데다가 녹까지 슬어 한참이나 무거운 레버는 소년의 힘으로 쉽게 조작이 되지 않습니다. 소년은 있는 힘껏 팔을 뻗어 또 다른 레버를 조작하려 하지만 손이 닿지 않습니다. 거기다 몸이 꽉 끼어 운신할 틈도 없습니다.

다음 순간, 가까이서 울리는 기적 소리를 늦게야 듣게 된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아들 있는 쪽을 바라보지만, 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당황한 아버지의 눈에 달려오는 기차가 보이고 이어 다리 밑에 매달린 아들이 보입니다. 너무 끔찍한 모습입니다. 아들을 살리려면 레버를 조작해 다리를 내리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면 기차는 탈선해 강으로 추락하게 되고 기차 안 손님은 몰살하고 말 것입니다. 아들을 살리자니 기차가 추락하고 기차 안 손님을 구하자니 아들이 죽습니다. 안절부절못하며 울부짖는 아버지. 레버를 잡은 손은 무섭게 떨리고 있습니다. 달려오는 기차와 다리 구조물 사이에 끼어 울부짖는 아들.

결국… 

트롤리의 딜레마에 관한 글을 읽다가 문득, 선택할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 행복은 크리스천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비 크리스천의 경우 모스트(다리)라는 이야기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비유라는 걸 알리도 없고 자기가 죽게끔 프로그래밍 된 차를 사지도 않으리라는 건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오직 생명으로 거듭난 크리스천만이 대속과 구속의 은혜를 알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대속代贖이란 대신 죽는다는 뜻이고, 구속救贖이란 피로 값 주고 산다는 뜻입니다.

어제 부산 지부 빌더스들과 구속에 대해 나누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구속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구속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생수와 생명력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마음을 전하는데 성령이 임하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래요. 구속의 은혜가 아니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부산을 비롯한 낮은울타리 지부 멤버들이 갈수록 건강한 부모로 세워져 가는 것도 구속사를 중심으로 말씀을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구속의 의미를 안다는 건 존재의 의미나 소명의 의미를 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구속사 중심으로 배운다는 건 자충성이나 항상성, 율법주의나 인본주의를 배격한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선행이나 강조하고 구제와 봉사, 십일조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완료된 계시, 즉 묵시의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속의 은혜를 통해 나타나는 역동성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얼마 전 양산에서 국내외 지부 멤버와 자녀들이 모여 글로벌 컨퍼런스라는 이름으로 지성소 예배와 통찰력 학교를 통해 주시는 생명력, 통찰력, 분별력, 창의력, 변증력을 목표로 삼박 사일의 시간을 보냈는데 참으로 즐겁고 의미 있는 모임이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건강한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음사역, 회복사역, 문화사역을 구속의 은혜를 바탕으로 정리하고 확인해 가는 시간은 너무도 소중했습니다.

그래요. 회복사역과 문화사역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복음이 빠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인데롬1:2~4,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창세기에 약속하신 구속 사역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으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구속을 빼면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그리스도가 사라지면 기독교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구속사. 오늘은 낮은울타리 복음사역의 핵심인 구속사를 정리해 드릴까 합니다. 부디 이 아름다운 주님의 역사를 우리 자녀들이 이해하고 인식하고 의존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구속사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말한다. 성경은 단순한 사건이나 우화를 적어 놓은 책이 아니라 창조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근원으로 하여 재창조의 완성에 도달하기까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기록한 구원사 신학이다.

구속사救贖史, history of redemption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건과 장차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는 사건이 하나의 중심적 사건 속에 요약되어 있는데 이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구속사는 계시를 통한 예언과 관계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하나님의 구속 섭리 가운데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죄의 공포와 장래의 유혹까지 극복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며, 그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영벌이 제거되고, 죄의 세력은 타파되며 영원한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과 자유가 선포된 것이다.

구속사는 창세전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중심으로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시는 전 역사를 가리킨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구속사를 정의하자면,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낙원의 회복을 위해 인류와 만물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經綸이라고 할 수 있다.

구속사라는 단어 중 구속救贖, redemption이라 함은 ‘해방’과 같은 뜻으로, 죄 속박에서 값을 주고 풀려나 자유롭게 되는 구원을 말한다. 따라서 구속은 반드시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 모든 종교가 나름의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죄의 결과인 사망롬6:23의 값을 우리 대신 지불하시고 흑암에서 건져내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마20:28. 정말이다.

구속은 ‘값 주고 사서 구원한다.’는 뜻으로 헬라어로는 아폴뤼트로시스를 사용한다. 아폴뤼트로시스는 ‘노예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 지불하는 돈’이라는 뜻이다. 로마 시대에는 노예 제도가 있었고, 당시 그리스도인 중에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 단어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였을 것이다.

구속사의 주제는 크게 창조와 타락과 구원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창1:26~27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타락하게 된 후창3:6. 하나님께서는 이 타락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속적인시121:3~4 구원 역사를 진행해 오셨다.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역사 속에서 중단 없이 전진하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확언해 준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이다. 아담 언약부터 그리스도의 새 언약까지 6대 언약과 성취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시대마다 연결시켜 준 고리였다. 그러므로 창조와 타락과 구원이라는 구속사의 주제 아래 하나님의 언약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어 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언약言約, covenant은 히브리어로 베리트 인데 계약 당사자들이 상호 간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언약은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게 특징인데 왜냐면 하나님은 창조주요 인간은 그의 피조물로서 본질적으로 상호 동등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라는 창세기 1장 18절 말씀에도 나타나 있듯이 언약을 세우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언약의 소유주도 하나님이시다.

히브리어 ‘베리트’는 ‘쪼갠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옛날 근동 지방에서 파기되면 안 되는 계약을 맺을 때 짐승을 죽여 쪼개어 양쪽으로 나누어 놓은 데서 유래된 말이다창15:10, 렘34:18. 계약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짐승처럼 쪼갬을 당한다는 의미지만 이것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맺으신 것이다.

경륜

구속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경륜administration은 한자로 날 경經, 낚싯줄 륜綸으로, 일을 조직하여 경영함이라는 뜻이다. 헬라어로는 오이코노미아인데 그 뜻은 청지기눅16:2~4, 갈4:2, 직분고전9:17, 경륜골1:25, 심오한 뜻엡1:9으로 번역되었다. 이런 의미를 종합해 볼 때, 경륜은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 지상 교회와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를 다스리고 경영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우주 만물의 운행과 질서, 시간을 가장 적절하게 조절하고 분배하고 배열하고 계획하고 지배하며 관리하시는 일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골1:25.

섭리

하나님께서 언약을 영속적으로 성취해 가시는 구체적 활동들을 구속사 속에서 행하신다는 의미의 섭리providence는 끌어당길 섭攝, 다스릴 리理로서, 사전적 의미로는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로, 이 섭리는 작정하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것을 질서 있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 곧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작정의 실현이다. 다시 말해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온전히 실현되기까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셔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신다는 의미이다.

점이 아니라 선

구속사에서 또 하나 중요한 단어는 '사史' 라는 단어다. 역사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여기서 강조하는 의미는 성경이 하나의 주제와 관점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연속성이다. 성경은 하나의 주제를 위해 통일되고 체계적으로 쓰여진 책이다. 얼핏 성경은 다양한 시대, 인물, 사건들이 그저 나열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선들이 연결되어 있다. 마치 이불이나 양복의 앞면을 보면 바느질실이 한 땀 한 땀 떨어져 있어도 속을 뒤집어 보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성경도 개별적인 사건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한다.
史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연속성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을 연속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야 계시의 참된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속사란, 성경을 공부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주제로 성경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관점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다.

왜 구속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첫째,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성경 공부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직접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성경의 주인공이 예수님 자신이며, 성경의 주제 또한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 인간의 자기 관점으로 보면 안 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틀린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기 마음대로 사사로이 풀면 큰일 난다벧후1:20. 구속사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관점대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시도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연구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께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배운 후에야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게 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전에는 예수님이 동행하고 계셔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한 마디로 무지하고 무능했다.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공부해야 눈이 열린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관점, 자기 교리로 성경을 보려고 하는데 정말 큰일 날 일이다. 구속사를 놓치면 인간 욕망의 발로인 성공, 출세, 물질, 행위, 죄, 율법이라는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쉬워 소위 망령된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예수님이 옆에 계셔도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상태, 하고 싶게 만드는 은혜의 복음을 “하지 않으면 안돼” 라는 율법으로 격하시키고 마는 실수가 얼마나 많은가. 오늘 우리는 엠마오로 가다가 눈이 열린 제자처럼 영혼의 눈, 믿음의 눈이 제대로 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구속사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믿음을 갖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왜 그렇게 두꺼울까? 예수 천당 마귀 지옥 같이 단순 구호나 가볍게 만들어진 제자 훈련용 소책자를 통해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간단한 구호, 작은 소책자, 눈물 섞인 간증만으로 믿음이 자라고 성화가 완성된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신의 성품, 성경적 세계관이 삶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복음 16장에 지옥에 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세상에 돌려보내 자기 형제들에게 전도하고 올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거절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거절당한 이유는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와서 전도해도 소용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죽은 형제가 돌아와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하면 귀가 번쩍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의 태도를 보고 실제일지 모른다는 고민이라도 해 보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그런 방식으로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믿음을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믿음을 정보 습득의 결과, 불확실한 사실에 대한 선택, 혹은 개인적인 신념, 긍정적인 사고방식 정도로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것들이 믿음을 구성하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결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연합함으로 얻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것이 기독교다. 부자의 부탁이 거절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믿음은 정보를 습득해서 어떤 선택이나 결단을 내리는 행위 정도가 아니라 생명력에 의한 전인격적이고 완전한 승복의 체험이다. 생명력은 통찰력, 분별력, 창의력, 변증력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는데 이것을 5 JESUS POWER라 한다. 믿음은 구원하기로 작정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변론에 항복하여 주권적인 은혜에 자신을 맡기는 결과를 이루어 낸다. 믿음은 결코 인간 주도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주도적인 행위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변론을 요청하신다. 날마다 계시 안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변론을 제의하신다. 우리는 그 변론 가운데로 들어가 승복한 이후에야 참된 은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은 불확실한 사실에 대해 모험을 거는 결단이나 동의, 맹목적 충성이 아니라 한 영혼이 하나님과의 변론을 통해 설득되고 감동한 뒤 굴복을 통해 나타나는 놀라운 결과다. 우리는 구속사를 통해 하나님의 변론에 올바르게 참여하게 되며 그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넷째, 믿음이 성장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언과 성취를 반복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관해 확신을 심어준다. 특히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은 성경 예언 성취의 절정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구속사가 점진적으로 이어져 온 이유는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공부할 때 믿음의 기초가 확실하게 다져지면서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라는 약속 때문이다. 구속사가 점진적으로 구체화되는 이유도 마찬가지, 우리 안에서 믿음이 구체화되도록 세밀한 비유와 상징들을 수없이 배치해 놓으셨다.

다섯째, 이단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구속사는 믿음의 역사인데 이어 달리기와 같다. 이어 달리기에서 앞 선수가 된 선수에게 바통을 건네주듯이 믿음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에게 믿음을 전해 주면서 구속 역사는 진행이 되어 간다. 이 구속 역사는 창세부터 시작되었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으며 종말까지 계속될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믿음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믿음에는 족보가 있다.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믿음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계승된다. 구약시대에는 주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믿음이 계승되었지만(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약시대에는 전도와 양육을 통해 계승된다. 사도 바울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복음을 전하고 해산의 수고로 제자를 양육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속사는 믿음의 계보를 따라 성경을 공부하기 때문에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저 혼자 깨달은 복음이 아니라 이미 신앙의 선진을 통해 이루어놓은 것을 전수 받음으로 독단성이나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된다. 구속사를 알게 되면 구원의 역사도 알게 되고 “오직 그리스도” 라는 전제하에 섭리의 역사, 경륜의 역사도 알게 된다. 구속사는 우리를 엄청난 묵시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묵시는 완료된 계시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게 됨을 확신하게 해 준다. 성경을 구속사로 보지 않으면 율법주의나 인본주의로 보기가 쉽다. 그러면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안개 속을 헤매듯 방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구속사를 공부함으로써 율법주의나 이단에 빠지지 않고 믿음의 계보를 계승해 갈 수 있는 것이다.

- 월간 낮은울타리 2018년 11월호 편집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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